작가 장류진의 가정사를 알고 나니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작가가 겪었던 어린시절의 경험들...
나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나도 내 어깨를 스스로 토닥여 줄 때가 있다.

나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내 인생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응당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 품게 된다는 한없이 편안하고 한없이 따뜻하고 한없이 애틋하다는 감정을 그때그때 흉내만 내고 진심으로는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것. 오히려 반대로 가족들과 있을 때면 한없이 불편하고 긴장되는 감정만 느꼈던 것. 동시에 그에 대해 자책하며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죄책감을 느껴왔던 것. 남들이 가족에게 응당 느낀다는 그런 근본적인 안정과 신뢰의 감정 비슷한 걸 느낄 때도 분명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 대상이 부모와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아저씨나 아주머니 등 완전히 엉뚱한 사람이었던 일들. 스물셋에 갑자기 독립하게 된 후부터 쭉, 원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난 뒤면 극도의 긴장감과 스트레스 때문에 항상 원인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신체화 증상을 겪었던 것. - P270
결국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을 몇 번이나 겪고, 각종 검사를 거치고, 내과적으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확인받고 나서야 나는 인정할 수있었다. 애써 피하고 미뤄왔던 그 일을 이제는 해야 할때가 왔구나. 그건 바로 ‘상담‘이었다. - P271
상담을 받기 시작하던 무렵 우연히 오래된 메일함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2008년 교환학생 시절 원가족들과 오갔던 메일도 거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4인 가족이었으니까 나를 제외한 가족 3인과 각각 주고받은 메일이었다. 전부 다 해봤자 열 통 남짓이었고, 그것이 내가 교환학생 기간 동안 가족들과 소통한 전부였다. 15년 전 메일이기에 무슨 내용이 오갔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처음에는 호기심에 메일을 열어 읽기 시작했다. - P272
그러나 메일을 한 편 한 편 읽어내려갈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입을 딱 벌릴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느끼는 불•편함의 근본적인 원인이 마치 샘플처럼 정확하게 들어 있었다. 현재의 문제점들이 15년 전 과거의 이메일에서 소름끼치게 똑같은 패턴으로, 대표적인 예시만 쏙쏙 발라, 너무나도 친절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표현이 조금 웃길 수는 있지만 그때 그 메일들의 한 문장 한 단어가 샘플로서 ‘버릴 것 하나 없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이메일처럼 보이지만 문제의 패러다임을 알고나니 조금만 행간을 읽으면 다 읽혔다. 그때는, 그 문제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지만. - P273
내 인생의 미스터리들. 여기선 차마 다 밝힐 수 없는 원가족들과의 이상한경험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이상했던 대화, 이상했던 장면, 이상했던 상황, 이상했던 대우, 이상한 자랑과이상한 비난, 정말 이상했던 위압과 더 이상했던 침묵, 이상한 규칙 혹은 무규칙. 이상했던 집안의 기류와 이상했던 내 유년의 기억들. 나 빼고 아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나만의 상처들. 내가 받아온 이상한 조롱과 이상한 기대들. 짓이겨져 이제는 도무지 펴지지 않는 마음들. - P273
세상에,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따로 있었구나. 많은 전문가와 연구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분석하고 분류해두었구나. 순기능가정과 역기능가정. 안정애착과 불안정애착. 외현적 나르시시스트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상담을 통해 상담학, 임상심리학, 정신분석학 용어와 개념들을 하나씩 공부하고 배워나가면서 나는 내가 아픈 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과 내가 겪어온 이상한 사건들이 거의 상담학 교과서에 나오는 예시나 다름없이알맞게 들어맞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자,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 P274
나는 내가 그저 공식처럼 흔한 인간이라는 사실에차라리 안도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한 원가족들과의 불가해한 경험을 처음 보는 상담사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꺼내놓을 때마다, 결국에는 티슈를 뽑을 기운까지 우는 데 죄다 써버린 채로, 크리넥스 티슈 통 위에 손만 얹은 상태로 겨우 물었다. "선생님, 이런 것도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나요." 나는 대답을 들었다. • "그런 게 트라우마예요." 상담사가 이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진 님이 현명한 사람이라 그걸 이렇게 잘 극복하고 이렇게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신 거예요. 그건 다른 누구의 돌봄과 지원이 아닌, 다름 아닌 류진 님의 내면의 힘으로, 스스로 하신 일이에요.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그동안 너무 잘해오신 거예요." - P276
똑.......똑...... 똑........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조금씩 부풀어 오르던 물방울이 계속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한 번 흔든 다음 다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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