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
워너 회플리치는 센트럴파크를 마주 보는 널찍한 아파트에서열린 케이터링 행사에서, 화이트 와인 스프리츠를 만들고 보드카와 콜라를 섞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난초와 두꺼운러그, 털이 길고 금빛인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워너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철책과 자물쇠로 가득한 어퍼이스트 사이드 거리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가 사는 구역의 나무들은 영향력 없는 고모들처럼 앙상하고 꼿꼿했다. - P21
어느 날엔가 워너는 그중 한 나무 위에서 왼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길 반복하며 그를 내려다보는 잉꼬 앵무새를 본 적이 있다. 앵무새는 나뭇가지에 부리 양쪽을 날카롭게 갈더니 한참 위에 있는 창틀을 향해 발작하듯 갑작스레 비행했다. 그에게 은유적인 순간들은 대부분 그림처럼 다가왔다. - P21
거리 쪽에서는 워너가 사는 집 건물이 한 채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서로 꼭 붙어 있는 쌍둥이 주택이 앞뒤로 연결된 형태였다. 워너는 왼편에 있는 입구로 들어간 후 뒤쪽으로 걸어가 5층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워너의 고양이 투가 그를 맞이했다. 투는 신나게 앞장서서 부엌으로 달려가, 펼쳐진 은박지 위에 놓일 얇은간 파테와 반투명한 생선회 몇 점을 기다렸다. - P22
그날 밤 마침내 잠든 워너는 마치 심해 바닥까지 1패덤**씩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선이 마침내 점화되어 건물 위로 화염을 올려 보내기 시작했을 때, 워너는 아마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향해 손을 뻗기엔 그를 짓누르는 물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단위 - P23
새벽 4시인가 5시쯤, 2C에 사는 세입자들은 천장에서 시끄럽게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곧 천장이 무너졌다. 바로 위층 3C에 사는 세입자들도 같은 소리를 들었고 그 천장도 무너졌다. 무사히 비상계단에 다다른 그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2C에 - P23
시는 세입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계단으로 탈출했다. 혼란과 두려움에 그대로 굳어버린 아내를 남편이 끌어내야 하긴 했지만, 공황속에서 그들은 집 문을 열어둔 채 나와버렸다. 화재는 2C를 에워싸더니 복도로 번졌다. 워너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에 잠에서 깼다. 그는 창가에 놓인 1.8미터 높이의 이층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킨 워너는 천장 전구에 달린 줄을 당겨 불을 켰다. 눈부신 빛 속에서 사각형 형체들이 튀어나왔다. 옷장, 출입구, 러그까지. 그리고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비명이 들렸다. - P24
워너의 머릿속에 생각들이 스쳐갔다. 너무 빠르게 굴러가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바퀴들 같았다. 그는 익숙한 침실 구조와 창문 환기구의 날개 사이로 흐르는 무거운 연기 냄새, 그리고 무릎꿇은 채로 이불을 덮고 있는 자기 다리를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리로 나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만했다. 워너는 옷을 집어 들기 시작했지만 정작 가장 먼저 필요한 속옷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뒤로 돌았다가 다시 앞으로 돌았다. 분명 기억 속에는 존재했다. 깔끔하게 개어 선반에 둔 밝은색 사각팬티를 비롯한 갖가지 속옷들이. 하지만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다음 단계와 워너 사이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막 같은 게 있는 듯했다. 워너는 뚫을 수 없는 커다란 옷장 앞에 섰다. 잠에서 깬 지 약 15초가 지났다. 점점 미쳐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소란스럽게 계속됐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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