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신뢰: 믿음은 관계의 시작이다.
뿔논병아리는 수심 1미터 정도 되는 호수의 물 위에 수초로둥지를 짓고 번식한다. 이 때문에 수초는 뿔논병아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알을 품는 시기부터 새끼가 둥지를 떠날 때까지 수초로 만든 둥지의 보수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물에 있는 수초는 썩기도 하고 수시로 유실된다. 그러니 틈나는 대로 보수해야만 둥지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수상 번식 조건 때문에 뿔논병아리가 수초를 활용한 구애 의식을 발달시킨 것이다. 수초를 잘 가져오고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짝으로서 충분히 신뢰할만한 조건을 갖췄다고 본다. 이처럼 동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에너지를 투자해 짝을 고르는 의식을 치르는 건 번식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그 핵심이 바로 신뢰 형성이다. 서로간에 믿음이 있어야 어떤 경우에라도 새끼에게 먹일 양식을 조달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침입자를 물리칠 수 있다. - P130
동물의 혼인 시스템은 종에 따라 다르다. 어떤 동물은 일부일처제를 지키는가 하면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를 유지하는 동물도 있다. ‘어떤 혼인 시스템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은 합당하지 않다. 각기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해당 방식의 혼인 시스템을 선택했을 뿐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부일처제를 가장 적합한 혼인 형태로 받아들이지만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사회도 있다. 우리만 해도 조선시대까지는 첩 제도(일부다처제)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따라서 그 사회에 맞게 혼인제도가 발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관점일 것이다. - P122
일부 조류는 일처다부제라는 특별한 혼인제도를 취한다. 대표적인 종이 물꿩이다. 물꿩은 제주도를 포함해 일부 남부지방에서 번식하는 여름 철새인데, 번식 주도권을 암컷이 쥐고 있다. 물꿩은 마름, 가시연 등과 같은 수면에 뜨는 수초들이 우거진 저수지에서 번식하고 별도의 둥지는 만들지 않는다. 기껏해야 몇 개의 수초를 모으거나 그냥 수초 위에 서너 개의 알을 낳는다. 산란이 마무리되면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우는 쪽은 놀랍게도 수컷이다. 그 사이에 암컷은 또 다른 수컷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알을 낳는다. - P122
왜 물꿩 암컷은 자신의 알을 스스로, 또는 함께 돌보지 않고 수컷에게 양육을 맡길까? 그 이유는 물꿩이 서식하는 저수지의 조건 및 번식 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가 많이 오는 7월의 저수지는 수위 변화가 심해서 알이 유실될 수도 있고 수초 위에 그대로 산란하기 때문에 알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높다. 만약 그런 사태가 생기면 물꿩은 번식이라는 한 해 농사를 망친다. 그래서 물꿩 암컷은 여기저기 알을 많이 낳아서 번식 성공률을 높이려 한다. 자신의 알을 수컷에게 맡기고 또 다른 수컷을 만나 교미를 하고 알을 낳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컷에 대한 신뢰이다. 만약 이러한 신뢰가 없다면 암컷은 자기의 유전자 50퍼센트를 간직한 귀한 알을 수컷에게 맡겨두고 떠날 수 없을 것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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