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인재가 전멸하다시피 한 것이 4.3이었다. 만 15세 이상 젊은이는 학살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죽은 젊은이들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했다. 고향의 촌로들은 "마을의 똑똑한 사람들은 그 사태에 다 죽고 우리 같은 무식쟁이나 살아남았다"고 입 모아 말한다. 그러니까 그 선배는 만 15세가 되지 않아 운 좋게 살아남은 경우였을 것이다. 그 선배에게는 손잡아 이끌어줄 바로 윗대 선배들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 P89

그것은 이른바 ‘레드 아일랜드‘ 출신 젊은이들이 겪어야 했던 숙명적 콤플렉스였다. 폭도·용공의 누명을 쓴 채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그 대참사에서 용케 살아남은 생존자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피해의식에 눈이 멀게 되었다. - P89

그랬다. 4·3은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될 무서운 금기여서 모든 사람의 입을 얼어붙게 했고, 피해의식은 깊이 내면화되어 마치 제2의 천성처럼 굳어져버렸다. 그것은 숙명적인 열패감과 자기부정 사상을 낳았고, 권력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 중앙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을 불러일으켰다. 오랫동안 여당의 표밭이 되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의 고향 땅은오랫동안 ‘레드 아일랜드‘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 P89

물론 《순이 삼촌》에 호의적인 독자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작품 속에 묘사된 참상들은 전체의 극히
일부일 뿐인데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읽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너무 끔찍하다고, 공권력이 설마 그런 일을 저질렀겠느냐고,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 저자인 나를 불온한 의도,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로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사상을 새빨갛지는 않더라도 불그죽죽하게 본 모양이었다. - P105

"당신, 왜 그따위 소설을 쓰는 거요! 난 그 책 읽다가 너무 끔찍해서 내동댕이쳤소, 추접하고 징글징글해서 구역질까지 했소. 왜 그걸 까발려? 그런 끔찍한 일은 누가 저질렀든 간에 우리의 정신 위생을 위해서 덮어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짜증나! 동족에 의한 학살, 그런 이야기를 누가 읽어서 좋아하겠소. 이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일 뿐이야."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