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뒤 가끔 그는 고든 핀치와 대화를 나눈 뒤 며칠 동안의 일을 회상해보았지만, 명확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죽었는데도 오로지 고집스러운 의지력 덕분에 습관적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며칠 동안 자신을 스쳐간 장소들,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묘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상황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강의를 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빠질 수 없는 회의에 참석했다. 그동안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P300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단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 P301

캐서린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쾌활하면서도 냉혹했다. 그는 핀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캐서린의 질문을 무시해버리고 그녀에게 웃음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쾌활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는
자신들의 마지막 노력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죽은 시체 위에서 생명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 P301

하지만 결국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음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공연 같았다. 문법적으로 정확한 두 사람의 말 속에 그들이 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완료형에서 시작해서 ("그동안 우린 행복했어요, 그렇죠?")과거형으로 나아갔다가("우린 행복했어요.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같아요) 마침내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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