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이상문학상 작품집 우수상 수상작
<일렉트릭 픽션>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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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그는 조금씩 손가락들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기타와 건반,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으로 만난 머리가 하얗고 긴 사람의 목소리. "......맛있는 초당옥수수." 얼떨결에 주 1회씩 3개월 치 레슨비로 24만 원을 계좌 이체했으므로 뭔가 당했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저렴한 비용이었고, 재니스는 학원을 떠나는 그의 손에 찐 옥수수도 쥐여줬다. 따끈했다. 어쩌다 24만 원을 내고 기타와 앰프와 찐 옥수수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까. 거래는 크게 실패했다. 음악은 조금 성공했다. 비밀스럽게 내린 결론이었다. - P133
그렇게 그의 기타는 작은 거실로 복귀했다. 목소리 큰 상인들이 만둣국을 시켜 먹고 슬리퍼를 신은 주민들이 치킨에 맥주를 마시는 상가로 주 1회씩 그와 함께 외출하게 되었다. 재니스는 기분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어떤 날에는 ‘눈물‘이나 ‘인생‘ 같은, 어떤 날에는 ‘미숫가루 수박화채‘ 같은 노랫말이 들렸다. 로저는 베이스 기타를, 무라카미는 드럼을 쳤다. 군밤이나 쑥떡이나 말린 살구를 얻어먹었다. 연습실에서 뭘 먹으면 안 되는거 아니냐고 묻자, 재니스는 "로커가 그딴 걸 신경 쓸 것 같냐?" 하고 타박했지만 "근데 음료는 안 돼요."라고 덧붙였다. 납득이되는 듯도 앞뒤가 안 맞는 듯도 했지만 그딴 걸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P133
저는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 가끔만 집에서 연주합니다.9시 이후에는 안 하겠습니다. 불편함이 있으시면 505호에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죄송합니다.
이것이 내가 다 쓴 건전지의 기분으로 엘리베이터에 탔을때 본 메모이다. 나는 이른 저녁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희미한 전기 기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뿐, 505호의 문 안쪽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이가 그인지 그녀인지, 젊었는지 늙었는지, 혹은 그중 무엇도 아닌지, 그 기타가 석양처럼 붉은지 파도처럼 푸른지도 알지 못한다. - P134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을 다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505호,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 사람. 배려와 무례가 섞인 문장들이 아주 조금 열어놓은 문. 그 틈으로 나는 김수영처럼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느라 가구를 끌어 옮겼던 이, 자우림처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기분으로 옷을 벗어 던지며 흥얼거린,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믿었던 이를 돌아본다. 지난 8년동안 그런 식으로만 잠깐 존재를 알렸던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작고 까만 눈을 깜빡거리다 잠에 빠지는 아기도 상상한다. 예전에 붙었던 메모를 나도 봤다. 그러나 그 녀석의 안에도 전기가 있다. 나는 아기가 울고 싶을 때 우렁차게 울기를 바란다. 머지않아 두 다리로 일어서서, 뛰고 싶을때 쿵쾅쿵쾅 뛰기를 바란다. 낯선 세상과 마주해 부단히 전기신호를 생성할 녀석의 신경세포들이, 정적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소란일지도 모른다. - P135
알지 못할 전기장치로 작동하는 엘리베이터가 나를 들어올리는 동안, 나는 가벼운 상승감 속에서 펜을 꺼냈다. 손대면 전기가 통할 듯한 종이의 여백에 이렇게 썼다.
저도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
501호, 내 몫의 문을 닫고 언제나의 집에 들어섰다. 창문을 열자 늦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 작은 거실 안으로 불었다. 비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늘 밤에는 세차게 비가 내려도 좋을 듯했다. 거칠지만 모두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이 조용한 동네의 골목과 골목 사이로 조금은 엉켰지만 분명 이어진 전깃줄들을 벼락처럼 울린다면, 전부를 감저시킬 일렉트릭한 멜로디를 연주한다면, 나는 비밀스럽게 웅얼거렸던 몇 개의 문장을 큰 소리로 발음해볼 작정이다. Hei kaikki, 모두들 안녕하세요. Kitty‘s, 감사합니다. Pidan sinusta, 저는 당신이 좋아요.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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