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이를 발견하는 일은 (심보르스카의 시 제목을 빌리자면) "경이"다. 우주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없는 시공간이 너무나 광대해서다. - P230
누군가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게 종이와 펜, 그리고 천 년의 시간을 주면서 어느 날 사랑하게 될 사람을 묘사해보라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녀와 같은 사람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런 나날들을 보내던 와중에 나는 한없는 경이와 감사를 느끼며 C에게 묻곤 했다. - P232
이 질문에 대해 가장 확실한 답변일지도 모를 그녀의 집 한가운데 서있자니 이보다 심오하면서도 신비로운 질문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나와 함께하게 되었을까? - P233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롭다. 우리 감각의 척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엄청나게 작은 데 비해 이 세상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바뀔지도 모른다. 발견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가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를 느낀다는 점이다. 끝없이 드넓은 이 우주에서, 삶이 무한히 변이하는 가운데,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경로들, 그리고 가능성들 중에서, 나는 여기 이 집, C의 곁에 있다. 그녀는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내 손을 잡고 거실을 나와 주방으로 간다. 나는 장작 난로 선반에서 그것을 집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직 내가 뭘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운석이야, 그녀가 말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소년 시절 들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발견했던 바로 그 운석이라고. - P233
최근 나는 이런 매일의 비범함remarkableness을 거의 압도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극기주의와는 딱히 관련이 없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들에, 특히 하나의 감정에 민감해졌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언어에는 이 감정을 지칭하는 이름이 없다. 아마 포르투갈어로 사우다지 saudade, 일본어로 ‘모노노아와레‘라 부르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이 감정은 찰나의 폭로를 통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깨닫는 느낌이다. 삶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허약한가, 얼마나 찰나인가. 이 감정이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조그만 위치에 대한 반응에서 일부 비롯되기는 해도, 경이로움awe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 감정에는 너무 많은 일상이, 또 너무 많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P284
이런 이유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sublime라 부른 것(물리적인 세계의 비인간적이고 광막한 장엄함이 불러내는 찬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과도 다르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감정에는 광휘도 공포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감사한 마음과 갈망, 그리고 예측된 슬픔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어 단어에서 이 감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은 ‘달콤 쌉싸름한bittersweet‘일 것으로, 사포Sappho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표현하려고 고안한 그리스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사랑의 기쁨을 사랑의 고통으로 처음, 그리고 영원히 땜질한 이는 사포였다. 그러나 ‘달콤 쌉싸름한‘이 행복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해도, 이 단어의 내밀한 기원은 우리가 세계와 마주할 때의 필연적인 측면, 즉 문제를 어느 정도로 감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드러낸다.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언젠가는 상실하게 된다는 문제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유형의 ‘그리고‘에 대해 이 말이 가장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형태건 우리의 슬픔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자각.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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