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쓰코는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날부터 10월 10일 가을 축제날의 그 가증스러운 사건이 있기까지, 에쓰코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면서 살아왔다.
에쓰코는 결코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도 삶의 보람이 생긴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조금이라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다름 아닌 이 어려움이 에쓰코가 느끼는 행복의 근거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삶의 보람‘과도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 P116

이때부터 에쓰코의 본능은 사냥꾼의 본능과 비슷해졌다. 어쩌다 저 멀리 조그만 덤불 속에서 산토끼의 하얀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지혜는 날카로워지고, 온몸의 피가 요동치고, 근육이 꿈틀거리며, 신경 조직이 날아가는 화살처럼 팽팽하게 긴장한다. 이런 삶의 보람이 사라진 한가한 날에는 사냥꾼도 언뜻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아궁이 옆에서 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 P118

어떤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너무나 쉽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인종 차별보다 더 심한 이런 불공정에 에쓰코는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못했다.
‘쉬운 게 좋은 건 당연하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는 것이 쉬운 사람은 그 쉬운 것을 삶의 핑계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은 그걸 금세 삶의 핑계로 삼는다.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삶에서 어려움을 찾아내는 능력은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삶을 사람답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삶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발을 디딜 수도 없는 진공의 구슬이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삶이 그렇게 보이지 않게 방해하는 능력이며, 삶이 쉬운 사람들에겐 알 수 없는 능력이긴 해도, 그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닌 그저 일상의 필수품에 지나지 않는다.  - P118

그녀가 느끼는 삶의 보람은 더 이상 내일도, 모레도, 모든 미래도 짐으로 여기지 않게 했다. 그것이 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지만, 무게 중심이 미묘하게 이동함으로써 에쓰코의 몸을 가볍게 미래로 향하게 했다.
희망 때문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 P119

에쓰코는 하루 종일 사부로와 미요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들이 어딘가 나무 그늘에서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밤중에 멀리 떨어진 방과 방 사이에 실 같은 걸 연결해 둔 것은 아닌지……………. 그런 발견은 그녀를 괴롭힐 뿐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통은 그 이상일 것 같아서, 에쓰코는 두 사람의 사랑의 증거를 찾기 위해 어떤 비열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의 행동은 인간이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 쏟을 수 있는 열정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섬뜩할 정도로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볼수 있다. 단지 희망을 잃기 위해서 이토록 쏟아붓는 열정은 어쩌면 인간 존재의 가시적인 형식, 그것이 유선형이든 아치형이든 어떤 형식의 충실한 모형일지도 모른다. 열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그토록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 P119

...... 인생을 살다 보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처럼 믿어지는 순간이 몇 번 도래하고, 아마도 이 순간에 사람들은 평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엿보게 된다. 그것들은 한번 망각의 늪에 깔려 있다가도 가끔씩 되살아나 세상의 고통과 환희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다시금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운명적인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게 되는 불행과 한 번쯤은 맞닥뜨린다...... - P137

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이 침묵의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은 에쓰코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기 위해 허락한 잠깐의 여유를 이렇게까지 즐기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끝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인가? 고통스럽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 P159

"그래." 에쓰코는 지친 듯이 말했다. 그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너는 미요를 사랑하니?"
사부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 단어였다.
그 단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뭔가 특별한, 사치스러운 어휘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 말에는 무언가 잉여의 것, 절실하지 않은 것, 불필요한 것이라는 어감이 있었다. 자신과 미요를 이어주는 절실한 관계, 그러나 반드시 영속적이지는 않은 관계, 어느 반경 안에 놓이면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그 밖으로 나가면 더 이상 끌어당기지 않는 자석과 같은 관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부로는 야키치가 아마 미요와 자기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미요의 임신 소식을 듣고도 이 젊은 일꾼에겐 도무지 아버지라는 자각이 생기지 않았다. - P163

하지만 지금 에쓰코가 느끼는 불안에는 그녀의 독창적인 불안과 이질적인, 뭔가 평범한 요소가 있었다. 미요를 내쫓는 행동을 했을 때 이미 이 새로운 불안의 첫 징후가 보였지만, 그녀가 이렇게 서서히 저지르는 과오의 크기는 그녀가 이 땅에서 부여받은 하나의 역할, 이땅에서 그녀가 간신히 앉을 수 있게 허용된 하나의 의자를 잃게 할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겐 입구인 것이 그녀에겐 출구일 수도 있었다. 그 문은 망루만큼 높은 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 입구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지만, 처음부터 그곳에 살았던 에쓰코가 창문이 없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출입문을 열면 발을 헛디뎌 추락사할지도 모른다. 이 방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이방을 떠나기 위해 이용되는 모든 지혜의 유일한 초석일지도 모르는데………… - P217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또! 또 시작이다.
얼핏 유용해 보이는 이 단어는 여전히 그에겐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평온한 삶에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불필요한 틀을 끼우는, 잉여의 개념으로만 느껴졌다. 이 단어가 생활필수품으로 존재하고,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이 단어에 생사를 걸 수있는, 그런 삶이 영위되는 공간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가지고 있기는커녕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런 공간의 주인이 그 방을 없애기 위해 집 전체에 불을 질러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 P230

이 순박한 소년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 누구였을까?
여기까지 몰아넣고 단지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어설픈 대답을 말하게 한 것은 누구의 죄일까?
사부로는 감정보다는 세상 물정이 가르쳐주는 판단에 의지하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남의 밥을 먹고 자란 소년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해결책이다.
잠시 생각해 보면 에쓰코의 눈빛이 자신의 이름을 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걸 그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 P231

여태까지 귀찮고 성가신 응대에 지쳐 있는 동안 사부로가 가끔씩 눈을 치뜨고 바라본 에쓰코는 여자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인 괴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신의 살덩어리,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고, 기뻐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는, 노골적인 신경조직의 덩어리였다.
그런데 일어서서 옷을 여미는 에쓰코에게 사부로는 처음으로 여자를 느꼈다. 에쓰코가 온실을 나가려고 한다. 그가 팔을 뻗고 막아선다.
에쓰코는 몸을 비틀어 사부로의 눈동자를 찌를 듯이 들여다본다.
물풀이 우거진 어두운 물속에서 보트의 노가 다른 보트의 선저에 부딪히듯, 이때 몇 겹의 옷을 사이에 두고 그의 단단한 팔 근육과 에쓰코의 가슴께 부드러운 살이 생생하게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부로는 더 이상 그녀가 쳐다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소리는 내지 않지만 안심시키려는 듯한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두세 차례 재빨리 눈을 깜박였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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