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남성성] 19세기 영국의 젠더 형성
--- 2장 타자의 몸: 인종, 성, 계급의 교차점
2장에서는 19세기 영국 남성들의 내면화된 우월성이 자본주의를 동반한 제국주의 구도 속에서
인종차별과 성적 차별의 질서를 토대로 도출되는 과정이 그들 단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히 대타성을 토대로 형성된 것임을 논한다. 이상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동시에 대척점에 위치한 식민지인의 전형을 만들어낸 과정이었음을 살펴보는 것이다.
식민지인들을 생물학적인 인종주의, 피부색, 기형적인 식민지인의 몸으로 나뉘어 비교적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는데,
억지로 꿰어맞춤한 듯 끝없이 이어지는 추측과 얼토당토 않은 주장들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 유럽인이라는, 허상으로 가득한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민지인의 <몸>을 대상화하면서 기형적이라느니 지나치게 성기가 크다느니 진화가 덜 된 원숭이라느니 괴물이라느니 하면서 급기야 그 몸을 전시하기까지 하고.... 이런 말들로 열등한 종족으로 만들려 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우월한 존재임을 과시하려 든다.
<호텐토트의 비너스>, 즉 사라 바트만의 몸을 전시하고 구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국 실험대상으로까지 전락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은 정말로 화가 났다. 문명인을 가장한 비인간적인 유럽인들에 대한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
1810년 런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제 가운데 하나는 호텐토트의 비너스, 즉 사라 바트만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앞서 언급했던대로 바트만은 1789년 남아프라카의 케이프 동부엣 태어난 코이족의 일원이었는데, 1810년에 런던으로 이송되어 우리에 갇힌 채 <전시>되었다. 그녀의 명성은 <엄청나게 큰> 엉덩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사실은 엉덩이뿐만 아니라 그녀의 커다란 소음순이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당시의 관객들은 그런 그녀의 몸이 모든 코이 족의 일반적인 몸의 형태라고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1814년까지 영국 곳곳을 돌며 <괴물 쇼>에 전시되다가 사창가로 넘겨졌고, 1815년 파리로 옮겨져서 일단의 과학자들에게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1816년 숨진 그녀의 시신은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와 앙리 드 뱅빌Henri de Blainville 등에 의해 정밀하게 해부되었다. 죽은 직후 석고로 본을 뜬 그녀의 몸 인형과 해부 후의 잔해는 1974년까지도 파리의 인간사 박물관에 전시 되었다.(108쪽)
이런 지식도 과연 필요한가! 과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우생학과 과학적 인종주의로 포장된 사이비 과학자들을 유혹하는 자연사의 대상"이었다는 지식백과의 설명이 너무 싫다.
"200년 가까이 박물관의 '유물'이었던 그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정부와 국제적인 인권단체 등의 노력으로, 2002년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평안히 잠드시길...!
<몸>을 둘러싼 19세기 유럽의 담론들이 말해주는 것은 어느 곳에있는 어떤 종족인가조차도 불분명함에도 그들의 <몸>이 끊임없이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야만인〉들의 <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유럽의 전통적 상응의 논리, 즉 외양과 내면이 일치한다는 가정에서 <그들>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자신들과 같은 이성적 존재, 기독교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없기에, 그들에게서는 <이성>이 아닌 <몸>을 주목하고, 이야기해야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몸>은 끊임없이거론되고, 논란이 되며, 구체적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 P109
여기서 몸을 둘러싼 제국주의의 실체는 결국 세계 구석구석의 존재에 대하여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주체로서의 우월성이다. 제국주의의 중심부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이들 식민지를 거대한 실험 집단으로 삼아 조사하고, 관찰하며, 실험을 가동시키는 주체가 된다. 이른바 계량화의 물결 속에서 식민지의 몸은 <객관성>이라는 것을 확보하게 하는 넓은 표본 집단으로서 동원되는 것이다. 전 세계로 그 단위가 확대된 담론 체계는 기존의 담론보다 훨씬 더 객관적인 듯 보일 수 있었고,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의 몸을 <말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주체는 곧 우월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다른 집단을 논하는 화자는 곧 침묵하는 우주를 아우르는 권력의 중심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누 <그들의 몸을 동원하는 것> 저체가 제국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정당화 양식이다. - P109
19세기 <몸>을 둘러싼 담론에서 제국을 동원하는 것은 견고한 타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주체>를 재정립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제국주의 유럽의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주체는 대타성을 통해 새로운 남성성을 추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엘리트 남성들에게 제국이란 종종 일종의 <통과의례>, <성인남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치러내야 하는 실습 과정과 같은 것이었다. - P110
여기서 <열등한> 집단은 앞서 고찰한 것처럼 기형과 불균형으로 표상되고, 그런 표상은 곧 여성적인 것과 중첩되었다. 따라서 균형잡힌 남성성의 이상은 이런 대타성 속에 창출되었고 <남성으로서 제국 지배자의 이미지는 국내에서는 여성의 권리 주장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리고 식민지에서는 식민지 종속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사용> 될 수 있었다. - P111
여기서 진정하게 남성적인 것은 <균형>과 <절제>라는 미덕이다. <남성적 아름다움의 정형이란 <조화>와 절제된 움직임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 딱 맞는 모든 것으로서, 어떤 것도 우발적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된다. 제국주의 유럽에서 시각적인 남성성의 이상이란 단순하고도 절제된 아름다움이었다. 이제 남성의 육체는 가장 완벽한 육체적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고양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중심부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 재현하기 시작한 그리스 시대 조각상의 아름다움이 부활하면서 군살 하나 없이 고상한 얼굴과 완벽하게 균형 잡힌 남성의 몸이 육체적 이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문학 분야에서 표현되었던 다양한 남성성의 이상형인 <신사, 사제, 그리고 군인>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육체와 맞물린 <자기 절제>를 강조하는 전형들이었다. - P111
새롭게 대두된 남성상은 모든 <타자>와 확연히 구분되는 지극히 배타적인 공동체를 가상하였다. 19세기 영국의 남성성에서 수도원을 부각시키는 양상은 향후 제5장에서 논의할 퍼블릭 스쿨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이 지식의 양성소는 엄격한 규율과 배타성, 나아가 남성 사이의 동지애가 강조되는 곳이다. 제국의 지도자를 양산하는 퍼블릭 스쿨에서 형성된 남성성은 그대로 제국을 유지하는 군대라는 또 다른 남성적인 집단으로 확산된다. 여기서 강인함, 지도력, 냉철한 판단력과 자기 절제가 강한 남성상은 분명한 중심부를 형성하며, 인종, 제국, 계급, 젠더를 둘러싼 제국주의 담론 체계를 통해 공고한 지배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 P112
이런 제국주의적 남성성의 이상화된 이미지는 열등한 식민지의여성성이라는 전형과 대비되면서 극대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라 바트만의 명성은 제국주의의 남성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이상화된 제국주의적 남성성의 상대적 극단을 형성하는 정수였고, 여기서 만인 앞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어야하는 당위성이 발생한다. 검은 피부와 기형적으로 커다란 엉덩이와 소음순을 가진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수많은 관찰과 응시를 힘없이 받아내야 하는 대상이다. 그녀의 <몸>은 <절제>와 <균형>으로 무장하고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던 19세기 영국의 남성성과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으로서, 제국주의가 낳은 지극히 전형적인 <타자>의 표상이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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