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카파》
각장의 마지막에 이런 일화들이 있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https://image.aladin.co.kr/product/34481/82/cover150/k812932547_1.jpg)
로버트 카파의 유대인 사진가 커넥션
에리히 잘로만, 앙드레 케르테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 마가렛버크 화이트, 로버트 카파…………1920년대 독일의 르포르타주 사진부터 포토저널리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50~60년대의 미국 라이프지의 전설적인 사진가들을 열거해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대부분이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에서 르포르타주 사진이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유대인 사진가들이었으며,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헨리 루스가 창간한 라이프지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라이프」지의 창간호는 사진기자들뿐만 아니라 편집자의 대부분 역시 유대인이었다. 이처럼 유대인이 사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재즈의 발전에서 흑인들이 차지하는 역할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
로버트 카파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에 대해 ‘잘알못‘인 분들이어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만큼 유명한 이 둘은 어쩌면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진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카파가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전쟁사진가로 알려져 있다면 브레송은 그의 사진 미학을 대표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둘은 출신과 성격, 사진 스타일 등 모든 것이 달랐지만 N과 S극이서로 끌리듯 사진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젊은 시절부터 친교를 나누며 서로를 챙겨주는 사진적 동지였다.
스페인 병사의 진실 공방
카파의 명성에 언제나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의혹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카파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쓰러지는 병사>의 사진이 조작된 연출 사진이라는 주장이다. 이 사진의 연출 여부에 대한 논란이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필립 나이를리Philip Knightley가 1974년 자신의 책 『첫 번째 희생자들 The First Casuality에서 당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며 로버트 카파와 조우했다고 주장하는 Daily Express 기자 오디 갤러거O.D. Gallagher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 시작이었다.
세계의 유명 종군 기자들의 기사와 사진의 많은 부분이 조작되거나 연출되었다고 주장하는 이 책에서 갤러거는 로버트 카파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면서, 카파는 공화군측 공보 장교의 협조로 몇 명의 군인을 데려와 연출을 하여 촬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카파는 이러한 연출 사진이 보다 실감나고 긴박한 상황에서 촬영된 것처럼 보이게 하기위해서 일부러 초점을 흐릿하게 해서 찍었다는 것이 이 책에 소개된 증언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곧 반박에 부딪쳤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 기간 중 단 한 번도 프랑코의 군대를 취재를 한 적이 없었고, 당시 만약 카파가 프랑코 진영을 취재하려고 했다면 카파는 프랑코의 부대에게 바로 체포되어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었다는 것이 당시 카파와 스페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카파와 타로의 사진이 실렸던 잡지 『뷔」의 지면을 보면 석연찮은 것들이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지면에는 비슷한 지역에서 라이플을 든 채 쓰러지고 있는 또한 명의 병사의 사진이 보인다. 그리고 사진 속의 병사는 마치 영화감독의 지시를 받는 배우들처럼 고지의 정상 같은 곳에서 승리의 포즈를 짓기도 하고 총을 들고 힘차게 참호를 뛰어넘고 있기도 하다. 이 사진들을 보노라면 당시 보도사진의 관행과 프로파간다인 시선이 합쳐진 연출 사진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카파와 헤밍웨이 카파와 헤밍웨이가 처음 만난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당시 이미 무기여 잘 있거라하는 또다시 떠오른다」와 같은 베스트셀러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던 헤밍웨이는 당시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군을 지원하고 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영화촬영을 위해 스페인을 찾았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 많은 기자들이 아지트처럼 사용했던 플로리다 호텔에서 만난 그 둘은 곧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카파는 "나는 그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나의 아버지로 입양했다."고 농담하며 그를 ‘파파‘라고 불렀던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헤밍웨이는 여자친구이며 훗날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마사 겔혼과 동행하고 있었다. 카파와 헤밍웨이 그리고 마사 겔혼은 매우 가까워졌지만 마초 성향의 헤밍웨이는 당시 전쟁터의 유일한 여자 사진기자이자 페미니스트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타로를 탐탁지 않아했다고 한다. 스페인 전쟁에서 그 둘은 함께 전장을 누볐으며 이후 그 둘은 2차 세계대전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연합군은 파리 진격을 앞두고 있었으며 헤밍웨이를 비롯한 3백여 명의 종군기자가 파리 진입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세계적인 대문호 대우를 받던 헤밍웨이는 군 장성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서 운전병, 취사병, 사진병, 차량, 그리고 무기까지 보유한 자신만의 작은 군대를 거느리고 독자적인파리 진격 준비를하고 있었고, 카파 역시 파파의 계획에 동승하게 되었다. 스페인 전쟁이후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베테랑 군인 못지않은 전쟁터에서의 생존 전략을 깨우친카파는 헤밍웨이와의 파리 진격 계획이 영 미덥지 않았지만 그의 파리 입성 소식은 남다른 뉴스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와 동행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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