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걸음만 걷자."
그때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다쓰오가 말했다.
"천 걸음 걸어서 반딧불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포기하고 돌아가는 거야."
"천오백 걸음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히데코가 한심하다는 듯이 대답해 모두들 웃었다.
"좋아, 천오백 걸음까지 걷지. 그래도 나타나지 않으면 포기하자. 그렇게 결정했어." - P201

부엉이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 순간 치요의 가슴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인가에서 떨어진 밤길을 이제부터 천오백 걸음 걸어서 만약 반딧불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되돌아가자. 그리고 도야마에 남아서 식당 일을 하면서 아들을 키우자. 그러나 만약 반딧불이 무리를 만나게 되면, 그때는 기사부로의 말대로 오사카에 가자. - P201

자리에서 일어선 치요의 무릎이 가늘게 떨렸다. 치요 역시 현란한 반딧불이의 난무를 한 번은 보고 싶었다.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생일대의 광경에 치요는 자신의 미래를 건것이었다. - P202

다시 부엉이가 울었다. 네 사람이 걷기 시작하자 벌레 소리가 뚝 그치고 그 깊은 정적 위로 창백한 달이 빛났다. 그리고 다시 벌레 소리가 땅 속에서 울려퍼졌다.
비탈길은 계속되고, 논에 댄 물이 멀리 발 아래에서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강물소리도 멀어지고 손전등이 비치는 부분과 인가의 등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202

냇물 소리가 왼쪽에서 차츰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서 길도 왼쪽으로 구부러져갔다. 그 길을 완전히 돌아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을 내려다 본 순간, 네 사람은 말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오백 걸음도 걷지 않았다.

수십 수백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강가에서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네 사람이 각자 가슴속에 그리고 있던 동화 속의 화려한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 P202

반딧불이의 무리는 용소(龍沼) 바닥에서  조용히 춤추는 미생물의 시체처럼 무한한 침묵과 시취를 머금은 채 빛의 앙금으로 변하여 하늘 높은 곳으로 희미한 광채를 발하며 차가운 불똥이 되어
날아오르고 있었다. - P203

네 사람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긴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때? 내 말이 딱 맞았지?"
"정말...... 굉장하네요."
치요도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거짓말이 
아니었군요. 하며 풀 위에 주저앉았다. 밤이슬에 젖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하고 치요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 애절하고 슬플 만큼 창백하게 반짝이는 빛의 덩어리에 넋을 잃고 있노라니, 이제까지의 일이 모두 거짓이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얹고 몸을 구부렸다.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말 있구나......"
귓가에 속삭이는 히데코의 입김이 다쓰오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 교미하는 거야. 또다른 반딧불이를 낳는거지."
긴조의 목소리는 열에 들떠서 내는 신음 소리처럼 
들렸다.


-----<반딧불 강> 중에서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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