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H와 대화를 나누고 한 달쯤 지난 후부터 나는 초등학교 입학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전에 나는 몇 번이나 민선 선배에 대해 글을 쓰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선배의 표정과 몸짓,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모두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이야기는 방향을 찾지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기만 했다. H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 이야기의 한편에 인희가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인희에 대해 쓰기 시작하자 잊고 있던 이름들이 하나둘 기억 위로 떠올랐다. - P167

긴 시간 동안 이 해변은 내게 쓰라린 장소로 남아 있었다.
오래전 민선 선배는 이 모래밭에 "사랑해!!"라고 썼다. 그때 난 열여덟 살이었고, 선배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 뼈아픈 실패를 뜻했고, 떠올릴 때마다 쓰라린 좌절을 안겨 주었다. 난 선배를 원망했었다. 과녁을 맞힐 수도 있었을
그 말을 환한 햇살 아래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그래서 더이상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선배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 P167

하지만 이 글의 후반부를 쓰고 매만지는 동안 나는 그 장면이 더 이상 내게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 장면은 여전히 슬픔을 주긴 했지만, 실패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 P167

나는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은 선배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사랑은 다른 사랑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과 몸짓은 그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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