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이저벨이 눈치를 챘어야 할 단서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 당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을 일들의 장면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휙휙 스치자, 그 행복한 봄의 기억은 송두리째 악의적이고 교활한 것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기억들을 피할 안식처마저 없어 보였다. 이를테면 빨래를 할 때, 이저벨은 세탁기에서 딸의 속옷을 꺼내면서 새삼 궁금해진다.  - P270

이 브래지어를 그 혐오스러운 남자가 만졌을까? 지금 손에 든 이 분홍색 팬티들은? 그 남자가 껴안으면서 머리를 기댄 블라우스가 이거고, 이 단추에
그의 손가락이 닿았겠지? 그 혐오스러운 인간이 손댄 옷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아낼 방법만 있다면 이저벨은 당장에 그 옷들을 내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옷이나 팬티는 오염된 채로 그녀의 집에 빨래 바구니에 서랍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녀의 집은 침범당했다. - P271

모든 것이 침범당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녀의 직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꼼짝없이 딸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을 뿐 아니라ㅡ도티 브라운의 자리에 앉은 에이미의 존재를 한순간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ㅡ에이버리 클라크도 당황스러운지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이저벨에게는 달콤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겨졌던 생활의 일부마저 사라져버렸다. - P271

적어도 그녀는 그의 입이 무거우리라는 것은 알았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와 같이 일하고 지금 같이 점심을 먹는 이 여자들이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녀는 앉아서 복숭아를 야금거렸다. 하지만 뚱뚱이 베브가 <에이번> 지를 곁눈질하면서 "립스틱 두 개와 영양크림 하나. 이걸 계산하려면 펜이 필요해. 나는 수학에는 늘 젬병이었거든" 하고 말하자 이저벨의 점심은 끝나버렸다.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수학에는 젬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 P271

‘수학‘이라는 한 단어로 이저벨은 배를 걷어차인 것 같았고, 그해 겨울밤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이 텅 빈 것을 알고 딸이 데비 케이 돈처럼 유괴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듯이 집안을 뒤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그 딸이 그녀를 속여온 사실을 알게 된것이다! (에이미가 말하지 않았던가. "몇몇 아이들은 수학을 잘해서 학교 끝나고 남아요." 그래서 한번은 이저벨이 "네 할아버지도 숫자를 잘 다루셨거든, 네가 할아버지를 닮았나보다" 하고멍청하게 지껄이지 않았던가?) 에이미가 그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신을 속였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이저벨은 정신이 멍했다. 그녀는 복숭아를 도시락 봉지에 넣고 통째로 버렸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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