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우묵한 정원》 배수아/은행나무

처음 몇 페이지만 시작해놓고 한동안 안읽었더니
하나도 기억이 안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는다.




1
여행의 시작에 우체부가 왔다.
이것은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이다. 여행은 편지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편지는 무엇으로부터 왔는가? 편지가 도착하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어떤 것과 우연히 마주친 직후였는데, 그것은 내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인 숲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한다.  - P7

아침. 정물. 손에 잡히는 대로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든 나는, 소파에 편하게 자리 잡고 책을 무릎 위에 놓고는 나이프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집중해서 독서를 할 생각이 없었고 책을 처음부터 읽어보려는 의도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책이 무슨 책인지조차 몰랐고 제목이나 저자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저절로 나타나는 어떤 글의 파편과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을 뿐이다. - P7

한번 집을 떠난 MJ가 집에 언제 돌아오는지 아무도 몰랐다. 짧게는 며칠 혹은 몇 주, 어느 때는 한 달 이상이나 연락도없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던 MJ는 어느 날 인사도 없이 불쑥 집 안으로 들어섰고, 밤에 전등불이 켜진 방을 보고 나서야 MJ의 귀가를 알게 되는 일이 보통이었다. 깊은 밤, 화장실에 가는 길에 목격한, 여행가방을 들고 복도를 걸어가는 MJ의 뒷모습. - P15

나는 다시 잠이 든다. 식모는 MJ가 병든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러 가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게 사실인지는 식모 자신도 확신이 없었고 우리도 믿지 않았다. 그보다는 MJ가 직접말했듯이 일 때문에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했다. 전등불이켜진 밤, 집에 돌아온 MJ는 텔레비전이 있는 좁다란 식당에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우리에게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채,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항상 걸치고 다니던 짙은 색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벽에 길고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거울이 걸린 복도 가장 끝에 있는 자신의 방 앞으로 가서는, 정말로 하숙인처럼,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방문을 열고,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방문 아래에 쌓여 있는 오래된 편지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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