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8월 용정

둘은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두 분 덕분에 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지난 몇 년간 지하활동을 했습니다. 정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 순간이 바로 종말의 전야라는 걸 저는 유격구에서 배웠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당신은 이제 완전히 변절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박길룡이 혁명의 배신자라면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군요. 응당한 대접을 내가 해주리다."
최도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최도식은 몸을 움츠렸고, 자전거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 P333

"내사 절대로 이정희를 죽이지 않았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오."
최도식이 소리쳤다.
"그렇게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것일 뿐이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가 물었다.
"거야, 당신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이었지비."
"그 편지......." - P334

그가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남자아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직 열 살도 넘지 않은 게 분명한, 최도식의 아들들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한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새 시대의 아이들. - P334

"그 편지, 내게 전해줘서 고마웠습니다. 그 얘기 하려고 왔습니다. 이제 가보죠.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요."
그는 울고 있는 아이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버지를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그는 우산을 그 집 앞에 던져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 집 앞으로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저녁 내내 그는 비를 맞으며 용정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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