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중 <늦은 우기의 바캉스>


요즘 나는 매일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다. 내 기억 속 규호와 같은 방식으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확신에서 좀체 벗어나기 힘들다. - P306

때때로 그는 내게 있어서 사랑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게 규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규호의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와 실체에 대해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P307

나는 지금껏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몇번이고 
나에게 있어서 규호가, 우리의 관계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특별한 어떤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순도 백 퍼센트의 진짜라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온갖 종류의 다른방식으로 규호를 창조하고 덧씌우며 그와 나의 관계를, 우리의 시간들을 온전히 보여주고자 했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규호라는 존재와 그때의 내 감정과는 점점 더 멀어져버리고야 만다. 진실과는 동떨어진 희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 P307

진실과는 동떨어진 희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 P307

나는 풍등에 쓸 문장을 여러번 고쳐 썼다. 다이어트,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나게 해주세요...... 뭔가 다 내 진짜 소원이 아닌 것 같아 빗금을 쳐서 지워버렸다. 아마도 그러는 사이 구멍이 나버린 것이겠지.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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