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에스테의 언덕길

21시 50분, 밀라노의 리나테 공항 출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트리에스테로 혼자 떠나는 여행치고는 비상식적일 만큼 늦은 시간의 비행 편이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도 공항 로비는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로 떠나는 여행객으로 북적여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그들의 열기에 휩쓸려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일이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까지와서 전송해준 친구들과 헤어져 탑승 대기실로 가보니 트리에스테행 승객은 그저 몇 사람밖에 없었다. - P7

문화적인 면에서도 트리에스테는 특이한 도시라고 할수 있다. 독일어 문화권과의 정신적인 연결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채, 트리에스테 사람은 존경과 동경과 증오가 뒤얽힌 감정으로, 이미 과거의 것이 된 빈의 문화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에게는 북쪽 나라들과의 연계가 정신적 사활의 문제인데도 언어적·인종적으로는 끊임없이 이탈리아를 동경하는 이중성이 트리에스테 사람의 정체성을 비할 바 없이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다음에는 이탈리아어로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하인리히 하이네의 서정시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형식사이에서 동요하고, 그 복잡함은 프로이트에게 경도된 사바의 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P19

증권거래소에서 움베르토 사바 서점이 있는 산 니콜로거리까지는 백 미터도 안 될 터였다. 하지만 곧장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쉬웠다. 언젠가 자기 것이 되리라는것을 알고 있는 보물에 일부러 서둘러 뛰어갈 필요는 없다. 그런 기분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몹시 그리워해 온 대상을 실제로 손에 넣는 게 어쩐지 두려웠다.
서로 맞서는 마음의 골짜기에 추락한 채 나는 산 니콜로거리와 교차하는 몇몇 좁은 길 여기저기를 향해 걸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색도 모양도 기묘한 마네킹이 세워져있거나 그저 상품 상자만 쌓여 있을 뿐인 쇼윈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 P21

움베르토 사바 서점은 좁은 길이 끝나는 부근 왼쪽에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 걸까. 예전에 남편이 이야기해주었을 때부터 내내 나는 이 가게가 경사 급한 언덕 위,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일에 지쳐 가게 앞으로 나온 사바가 허리에댄 두 손으로 등을 지탱하듯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파란 눈에는 하늘의 파랑이 비치고 있다. - P23

하지만 현실의 서점은 좁고 낡아 보이는 부티크 거리의 막다른 길에 있었고, ‘두 세계의 서점‘이라는 원래 이름은 약간 속된 느낌의 ‘움베르토 사바 서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용기를 그러모아 나는 문손잡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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