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너무 흔하고 친근했다. 어느 집에서 초상이 나면 마을전체가 떠들썩했다. 따라 죽지 못한 후손들의 육체에 씌워진 성긴 의상과 그들의 곡소리만 아니라면,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이 흡사 잔칫집이나 한가지였다. 실제로 어린아이들 눈에는 혼인집과 초상집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상여가 마을을 빠져나갈 때 그긴 만장과 사람의 행렬은 아이들을 매혹시켰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야단맞으면서도 그 상여의 행렬을 따라가곤 했다. 죽음은 어떤 걱정도 주지 않았다. 어린 박부길에겐 더욱 그랬다. 삶이 그런것처럼 죽음도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 P68
뒤란의 남자가 마침내 죽었다. 감나무가 밤새 내린 서리를 맞고빨갛게 익은 감을 서너 개씩 떨어뜨리던 가을날 아침이었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난 박부길이 가만가만 뒤뜰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는 떨어진 감을 주울 생각만 했고, 뒤란에 무슨 일이 벌어져 있으리라는 상상 같은 것은 할 수가 없었다. 박부길씨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대목에서 또 몹시 망설였다. - P68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겁니다. 뒤채의 방문이 열려 있고, 몸이 반쯤 문지방을 넘어온 채로 그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습니다. 피는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서로 엉겨붙어 웅크리고 있었지요. 나는 보았습니다. 피는 그의 오른쪽 손목에서 나오고있었습니다. 그의 다른 쪽 손에 들린 것은 어이없게도 손톱깎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숨막히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톱깎이는....... 왜냐하면 그 손톱깎이는 큰아버지의 책상서랍에 넣어져 있었는데, 그가 그 전날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부길이는 참 착하구나." - P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