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인 밤 모호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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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처음 만나는 파스칼 키냐르인데 하필 제목이 <성적인 밤>이라 나도 좀 당황스럽긴 했다. 그저께 밤에 앞 부분 그림들을 보고 에세이도 읽었는데 온전히 그림의 이해를 돕는 설명이려니 하고 읽었다가 생각보다 문장이 어려워 또 놀랐다. 다시 정신차리고 읽어나가야함을 알게 되었다. 야하고 잔인하고  섬뜩하고 기묘한 그림들이 잔뜩인데다 책의 판형도 가로로 긴 책이고 표지도 속지도 검은 색(어둠이 바탕이자 근원이라는 키냐르의 지론에 따른 것)이라서 엄청 집중하며 그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그림들이 다 예사롭지 않고 또 많은 수의 그림들이 어찌나 에로틱하고 에로틱하고 에로틱한지..... 집중해서 들여다볼 수 밖에 없도록 구성이 되어 있는데 - 에로틱한 그림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않을까! - 이 난감함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이건 예술이야! 생각해도 안된다는 한계를 수없이 경험했다. 그런데도 몰입이 되었다. 아.... 이것은 설명이 필요없는 감정이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선형적이며 일방향성인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를 글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키냐르의 세계에 동화되면서 몰입할 수 있는 몇 시간이었다는 것이 지나고 보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핸드폰과 핸드폰 속의 영상들에서 완벽히 멀어져 있었다. 삶과 죽음,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포착한 회화 작품들을 보면서 저절로 아득해지는 감정들을 주체하기 힘들어지는데 이런 감정은 그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낀다(쉬운 문장들만은 아니어서 더 그랬다!).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만 가득했다면 한 권의 춘화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그림일지라도. 




탈장르적인 글쓰기를 구사했던 파스칼 키냐르는 자신의 문학 안에 회화, 음악, 춤 등 다른 예술 장르를 끌어들였다. 특히 회화에 대한 키냐르의 관심은 "사유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귀결이 된다. 이 책은 총 27개의 장章으로 구성이 되어있고 각 장의 주제도 다양하다. 성경과 신화와 상징의 세계를 이루는 제목들이 다수이다. 가령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디도 여왕과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의 사랑의 장면에서도 그렇고, 장 뤼스탱의 작품인 <세 명의 등장인물>에서도 부모의 원초적 결합에서 밀려나 질투심에 불타는 아이가 함께 등장한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질투심하다니... 이 얼마나 생경한 감정인지...), 아브라함의 형제인 롯과 롯의 정자를 훔치는 그의 딸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 놀리 메 탄게레(5장,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마리 마들렌과 놀리 메 탄게레, "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명령하는 예수님을 형상화한 그림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그림을 형상화한 8장 잠과 꿈, 지옥과 야수들, 관음증, 나르스와 베누스, 중국의 원초적 장면들을 그린 회화가 여러 장에 걸쳐 펼쳐진다! 또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를 형상화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들이 쉬지 않고 등장한다. 눈에 익은 그림들도 있지만 대부분 생소하거나 기괴하거나 끔찍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너무 아름다워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키냐르의 문장을 읽으며 공감하게 되고 이러한 그림들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넘어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글이 함께 하니 부끄럽던? 마음이 조금 상쇄가 된다. 키냐르의 글이 있어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 지라도. 그럼에도 도저히 이해 안되는 그림들도 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외설적인 그림들이 이렇게 많은 빈도로 그려진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서양화를 감상함에 있어 신화와 성경을 알지 못하면 그 그림이 내포한 상징과 은유를 다 이해하긴 어렵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을 오픈 된 장소에서 펼쳐 놓고 읽는 건 작품의 수준과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자신있게 펼쳐 놓고 보려면 보통 용기로는 힘들다~~^^ 아니 난 불가능했다. 어제 오전에 수영 끝나고 도서관에서 다 읽을 수 있겠지 싶어 책을 미리 챙겨갔다. 도서관 갔더니 다행히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펼쳐 놓고 읽고 감상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는 건 또 좀 곤란하겠단 생각이 들어 적당히 책장을 살짝 들기도 하고 다른 책으로 가리기도 하면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오해할? 야릇한 그림들이 계속 나오고 또 나오고... 아, 정말 계속해서 나오는 거다. 거기다 책장이 모두 검은색이니 그림들이 얼마나 더 도드라져 보이겠냔 말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 밝은 사람이 찰나의 순간으로 본다 할 지라도 에로틱한 그림을 알아볼 거 같았다. 빨리 읽고 바로 반납(대출반납기계엔 반납이 안되고 붉은색으로 책 앞 표지 귀퉁이에'19세미만구독불가'라 붙어있고 '안내데스크에서만 대출/반납이 가능합니다'하고 스티커도 붙어있다.) 하고 올 요량이었는데 낭패였다. 설상가상 같은 테이블 한 자리 건너 새로 남자분이 들어와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고 대각선으로 건너에도 열공하는 또 남자분.... 이젠 정말 안되겠다. 과감히 책을 덮고 일어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 앤서니 호로위츠의 <중요한 건 살인> 두 권을 빌려서 집으로 왔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아, 얼굴 화끈거려 혼났네. 





   밤의 침묵 속 그 심중 바닥을 헤아릴 때면 희열 속에 우릴 만들어냈을 그 초라한 상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진다.

   내가 수태되었던 밤, 나는 거기 없었다.

   당신보다 앞서 있는 날을 목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p11)



   우리 시대에 너무 자주 사용되는 "원초적 장면"(scene primitive)이라는 표현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여자의 교미에서 파생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분명 이 표현에는 지나친 것이 있다. 아직 수태되지 않아 이 교미는 불가피하게 그들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인 밤"(nuit sexuelle), 그러니까 '성교의 밤'이라는 표현을 선호해야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불안한 영혼에게는 최초의 형상화가 문제가 아니라 선행하는 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상력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는, 태생동물성과 잠이 성욕을 주문한다. (p101)




   자크 라캉은 지옥을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환각이 지옥을 오게 한다. 지옥을 구현할 방도를 찾는다. 욕망의 저 맨 밑바닥에는 피학 취미(마조히즘)가 있다. 관능 저 맨 밑바닥에서는 능동적이지 않으려는, 자지러지고, 흐물흐물 녹고, 완전히 소멸되고 싶은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인다. 피학 취미는 욕망을 더 강화한다. 욕망으로 고통받는 자처럼 살아가는 주체를 "마조히스트", 그러니까 피학대 음란증 환자라 부른다. 이들에게는 천국보다 욕망이다. 차분한 가라앉음보다 살아 있다는 감정이다. 무성 혹은 중성 상태의 복된 행복 속에 잠이 들고, 잠이 들자마자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행복보다 실존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13장 야수들, 관련그림: 디르크 바우츠, <영벌받은 자들의 전락>,1470. p118)




   죽음과 최초의 생은 너무나 기이하게 둘 다 완전히 깜깜하다.

   세 개의 밤(자궁, 천상, 하계) 뒤에 제 4의 밤이 있다. 수태한 밤 뒤에, 낮과 지상의 밤 뒤에, 죽음의 밤 뒤에 진짜 밤이 있다. 밤의 밤, 비생물적인 밤. 생 이전의 밤, 존재 이전의 밤, 빅뱅 이전의 밤이 있다. 

   시간의 밤, 우주 저 바닥의 허무, 별다른 소명도 없이, 그저 공허를 만들며, 불타는, 과도하게 검은 밤.

   화석의 밤.

   과거의 밤 저 밑바닥에는 저 옛날의 밤이 있다.

   거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비방향성의, 비관련성의, 비존재성의 밤이다.(p255)




   비가시적 장면의 마지막 특징을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전적으로 우울한 것이라 이를 아직까지 말하지 않고 빼놓았다. 이성애를 통해 해후하는 것은 비로소 하나가 된 두 개의 절반이 아니다. 서로 보완되는 두 개의 성기가 아니다. 서로를 탐사하는 두 불완전체이다. 영영 알 길 없는 차원 속을 "함께 가는"(라틴어로는, co-ire)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다. 그들은 원초적 차원 속을 배회한다. 결국 항상 좌초되고 마는 결합, 결국 항상 떨어져나오는 사지, 결국 항상 서로에게서 빠져나오는 음문과 페니스. 결국 항상 서로 마주보는 강가에서 다시 만나는 두 존재.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믿고 있으나 ㅡ 물론 실제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ㅡ 같은 나체에서 출발해 그 언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에 같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두 강기슭에 서 있다. 너무 힘들어 멀리 떨어진 강기슭. 그들은 서로 귀를 기울인다.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서로 끼워진다. 떤다. 눈을 감는다. 다 보는 것은 아니다. ... 인생은 너무 짧다. 인생은 너무 짧지만, 인생의 저 안쪽 바닥에서 밤이 꾸물거리며 지체하고 았다. 인간은 그렇게 죽는다. 사이펀 효과가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 커다란 수면 아래로 흡입되는 것이다. 지상 그 이전에 있던 커다란 수면 아래로. (p266~272)





그림과 글을 함께 놓고 읽을 땐 그나마 이해가 되는 거 같았는데 오늘 글만 다시 읽어보니 이 문장들이 어떤 그림과 함께였는지 기억도 안 나고 어렵게 느껴진다. 하루 지났을 뿐인데... 미술관에서 이런 그림들을 전시한다면 도저히 못 볼 거 같다. 하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책으로 나온 걸까? 하하하... 그렇지만 그 그림이 그려진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글을 읽었던 시간은 나에게 완벽한 몰입을 선사해 주었다. 어설프게 미술관 다녀온 것보다 훨씬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겠다.(이 책은 혼자 있을 때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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