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낙관주의자의 죽음
술자리에서 지인의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이 부고도 없이 조용히 처리한 걸 보니 자살이 아니었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는 쾌활했고 유머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학부 시절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리포트를 쓴적이 있다. 그는 자살을 단순한 개인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라 설명했다. 이기적, 이타적, 아노미적 자살이 기억났다. 그중 아노미는 상당히 흥미를 끌었는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이 주류사회 탈락으로 택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 P261
한나 아렌트의 「우리 망명자들이란 글을 읽고 있다. 최근 디아스포라에 대한 책을 중점적으로 읽다가 만난 글이다. 많은 유대인이 살아남아 중산층의 위치에 오르고 명랑쾌활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 글이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단편 소설집 『주기율표』의 저자 프리모 레비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P262
한나 아렌트의 글을 보자.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 P262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며 그들은 싸우고 저항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 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어깨의 짐을 벗었다고 쾌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어깨의 짐을 벗게 되길 원하게 되고 실제로 자살한다고 했다. - P263
‘기묘한 낙관주의자‘, ‘자기본위의 죽음‘. 낯설지 않다. 「우리 망명자들이란 글은 「파리야로서의 유대인이란평론집에 실려 있다. ‘파리야‘는 차별받는 자란 뜻이다. 파리야가 핵심이다. 이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자들이 죽음에이르는 과정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 견고한 절망. 이것은 사회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는 무지해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인간을 믿을수 없다는 것. 어제 당신을 향해 웃던 친구들, 친절한 이웃들이 갑자기 등을 돌릴 때 세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 P263
다시 나의 지인으로 돌아간다. 내가 아는 그는 우리나라의 엘리트층에 속하고 재력도 있다. 쾌활하고 유머감각이 있으며 열린 사고를 갖고 있어 후배들도 좋아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코로나로 그의 사업이 힘들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그는 늘 웃고 있었다. - P263
거리에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문득 두려워진다. 사는 게 전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전시에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 고독의 죽음. 그 대척점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수 있을까? - P2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