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독일과 히틀러의 꿈이 떠나간다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고통, 실수의 고통이, 파괴된 잔해와 더러운 눈발, 일몰의 피로 물든 창문들이... 말고기를 담은 솥 위의 연기를 바라보는 존재들의 양순한 인내라는 결과로 이어지다니... 삶의 깊은 곳에는 얼마나 무디고 무거운 힘이 놓여 있는가.....
32 야전헌병대장 할프가 제6군 참모부로 중대장 레나르트를 호출했다. 레나르트는 한참 뒤에야 도착했다. 경차에 연료 사용을 금지하는 파울루스의 새 명령 때문이었다. 모든 연료는 군 참모장 슈미트 장군의 재량하에 놓였으니, 열번 죽어도 연료 5리터를 받아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제 병사들의 라이터는 말할 것도 없고 장교용 차량에도 연료가 부족했다. - P188
레나르트는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야전 우편물을 가지고 시내로가는 참모부 차량에 올랐다. 작은 자동차가 얼음 덮인 아스팔트를 굴러갔다. 바람 한점 없는투명한 대기 속에 반투명의 가느다란 연기가 전선의 벙커와 토굴위로 솟아올랐다. 시내로 향하며 그는 머리에 수건과 스카프를 동여맨 채 걸어가는 부상자들과 명령에 따라 시내에서 공장으로 이송되는, 역시 머리엔 수건을 동여매고 발은 헝겊으로 휘감은 병사들의 모습을 보았다. - P189
운전사가 길가에 죽어 있는 말의 사체 옆에 차를 세우더니 모터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레나르트는 단검을 들고 반쯤 언 말고기를 잘라내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말의 드러난 갈비뼈 사이로기어오른 한 병사는 마치 다 지어지지 않은 지붕의 서까래에 올라탄 목수 같아 보였다.………… 부서진 건물 잔해들 사이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삼각대에 검은 솥이 걸렸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허리에는 수류탄을 찬 병사들이 헬멧, 군모, 이불, 목도리 따위를 뒤집어쓴 채 둘러서 있었다. 취사병이 장검을 휘저으며 솥 위로 떠오르는 말고기 조각들을 밀어넣었다. 벙커 지붕 위에서는 한 병사가 거대한 하모니카 비슷하게 생긴 말 뼈다귀를 천천히 뜯어 먹고 있었다. - P189
문득 지는 태양이 길을, 죽은 건물들을 비추었다. 다 타버린 건물의 검은 눈구멍들이 꼭 얼어붙은 피로 가득 찬 듯 보였다. 전투가 남긴 검은 재들에 더러워지고 포탄의 발톱에 파헤쳐진 눈밭이황금색으로 물들고, 죽은 말의 몸체가 만들어낸 검붉은 동굴도 환히 밝혀졌다. 땅을 휩쓸던 눈보라가 날카로운 청동빛을 내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 P190
석양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며 시각적 인상을 그림-이야기로, 감정으로, 운명으로 바꿔놓는다. 꺼져가는 태양 속에서 더러움과검댕의 반점들이 수백의 목소리를 내고, 인간은 마음의 고통을 가버린 행복을,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실수의 고통을, 희망의 영원성을 깨닫는다. 이는 동굴 시대의 광경이었다. 척탄병들, 국가의 영광, 위대한 게르마니아의 건설자들은 이제 승리의 길에서 멀리 내팽개쳐졌다. - P190
헝겊 조각들로 친친 동여맨 사람들을 바라보며 레나르트는 시적인 직관으로 알아차렸다. 이것이 바로 일몰이라는 것을, 꿈이 떠나간다는 것을. - P190
히틀러의 번뜩이는 에너지가 가장 진보적인 이론으로 무장한강력한 이들이, 날개 돋친 민족의 힘이 이 얼어붙은 볼가의 고요한 강변으로 이어지다니, 파괴된 잔해와 더러운 눈밭, 일몰의 피로 물든 창문들, 말고기를 담은 솥 위의 연기를 바라보는 존재들의 양순한 인내라는 결과로 이어지다니, 삶의 깊은 곳에는 얼마나 무디고 무거운 힘이 놓여 있는가......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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