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때 보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순혈 노동자 출신이오. 아버지도 노동자였고 할아버지도 노동자였지. 내 이력은 유리처럼 투명하오. 그러나 나 역시 전쟁 이전에는 쓸모가 없었소."
"어째서요?"
"난 노동자·농민 국가가 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관료주의를 보지 않소. 하지만 전쟁 전 노동자인 내가 왜 강제노동을 해야 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 왜 내게 창고에서 감자 고르는 일을 시키는지, 혹은 거리를 청소하게 하는지 말이오. 난 그저 계급적 관점에서 수뇌부를 좀 비판했을 뿐인데 ㅡ그들은 정말 호화롭게 살았거든 ㅡ곧장 내 목을 조르는 거요. 내가 보기엔 결국 그것, 노동자가 자신의 국가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상황이 관료주의이고, 그
속에 관료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소." - P113

다렌스끼는 보바의 말이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을 건드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자신을 진정으로 불안하게 하는 주제에 대해 말하거나 듣는 일에 익숙지 않았던 그는 문득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눈치 보지 않고 두려움 없이 이야기하는 행복,
마음에 불안과 당혹감을 심어주기에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논쟁하는 행복이었다. - P113

여기 오두막 바닥, 술에 취했다가 다시 깨어난 이 소박한 군인과나누는 한밤의 대화, 우끄라이나 서부에서 이곳 사막까지 쫓겨온 사람들의 존재를 주위에 느끼며 이어가는 대화 속에서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것, 바람직
한 것이자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것, 그래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
인간 대 인간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P113

"그렇다고 내가 원한에 가득 차 있거나 한 건 아니오." 다렌스끼가 말을 이었다. "오히려 허리 굽혀 백번 천번 감사하고 있지. 난 행복하오. 그리고 바로 여기 또다른 비극이 있소. 내가 행복하려면,
내 조국 러시아에 힘을 바칠 수 있으려면 이처럼 가혹한 시간이 와야 한다는 점 말이오. 참 씁쓸한 일 아니오? 차라리 저주를 받는 게 낫지." - P114

여전히 대화의 본질, 자연스러운 빛으로 삶을 밝혀주는 중요한 핵심에는 도달하지 못한 기분이었으나, 평소 생각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말한 지금 다렌스끼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보바에게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오늘밤 당신과 나눈 대화를 난 평생 후회하지 않을 거요." - P115

15
젊은 장교가 복도로 나와 호송병에게 몇마디 하고는 미하일 시도로비치를 들여보낸 뒤 그대로 문을 열어두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카펫 깔린 바닥과 꽃병에 꽂힌 꽃송이들, 벽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숲과 붉은 지붕을 올린 농가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이 도살 감독자의 방이군, 모스똡스꼬이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짐승들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고, 그들의 내장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피투성이 도살자들이 있는 곳 바로 곁. 그러나 카펫이 깔린이 평화로운 방과 도살을 연결 짓는 것은 책상 위에 놓인 검은 전화기들뿐이었다. - P119

적! 얼마나 단순하고 분명한 단어인가. 다시금 체르네쪼프 생각이 났다. ‘슈트룸 운트 드랑(독일어. 격랑의 시대)"에 참으로 보잘것 없는 운명이야.
 그런 시대에 레이스 장갑을 끼다니. 모스똡스꼬이는 자기 손바닥과 손가락을  살펴보았다. - P119

18
그레꼬프가 넓적한 사자코를 벌름거리며 입을 열었다. "샤뽀시니꼬프, 동지는 전출이오. 당장 연대 참모부로 돌아가시오."
세료자는 여자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흠칫 떨렸고, 그녀 또한 그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혀와 입천장이 바싹 말라 있었다.
구름 낀 하늘과 땅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외투를 덮고 누운 이들 모두 뜬눈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 P156

모든 게 정말 멋지고 살가웠는데. 세료자는 생각했다. ‘천국에서 추방되는군. 그가 농노를 가르듯 우리를 갈라세우려는 거야.‘ 그는 애원과 증오를 품고 그레꼬프를 바라보았다.
그레꼬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이 세료자에게는 더없이 혐오스럽고 잔혹하고 뻔뻔스럽게 여겨졌다. - P156

"명령은 그게 다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선전신수가 동지와 함께 떠날 거요. 여긴 무전기가 없어 아무 일도 못하니 그녀를 연대 참모부로 데리고 가시오."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부터 동지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거요. 증서를 가져가시오. 둘 몫으로 한장만 써두었소. 끄적거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내 말 알아들었소?"

갑자기 세료자는 평생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답고 인간적이고 현명하고 슬픈 두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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