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황금 장미를 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오후의 정적과 석양. 몽파르나스 묘원을 산책하는 나는 자주 저 먼 하늘을 본다. 하늘 이외에 달리 어디를 볼 것인가. 죽은 자들의 빈집들과 그들의 상징들, 그리고 이제는 먼지보다 가볍게 사그라진 그들의 육신을 처음부터 짓누르고 있는 현재의 검고 붉고 흰 묘석들. 영원과 순간의 교차가 파도처럼 휘몰아쳐 메마른 가슴팍을 찔러대고, 나는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울음을 울고 싶어진다. 나를 위해서도 저들을 위해서도 아닌 단지 이 세상 혹은 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위해서 우는 것이다. 울음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 P68

막강한 돌조차도 고사목처럼 삭은 몸을 내보이는
저 시간의 위녁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이 덧없는 발
길과 저 덧없는 마음의 경미한 충동들을 이리저리 흘려보내며 마침내 도달한 곳이 ‘세기의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1914~1996의 집이다.

열다섯 살 반, 날씬한, 오히려 연약하다고 할 수 있는 육체, 아기 젖가슴, 연한 분홍빛 분과 루주를 바른 얼굴. (중략)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고, 아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P69

모든 것이 ‘거기 있다‘ 또는 ‘거기 있었다‘. 실존철학자들과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즐겨 쓰는 이 시제時制만 달리한 두 문장에는 아찔한 의식의 벼랑, 시간의 벼랑이 가로놓여 있다. 나는 삶이 혹은 글쓰기가 권태로울 때는 지루한 허공에 침을 뱉기라도 하듯 뒤라스의 작품들을 충동적으로 펼쳐보곤 한다. 유년을 송두리째 인도차이나의 이방인으로 보낸 뒤라스적인 벼랑 의식이 나를 다시 글쓰기의 욕망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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