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생트의 정원> 시도니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난 알고 있었다. 게리통 노인이 죽어가는 걸 보려고 보리솔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의 비겁함을 잘 알면서도 입은 다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귀로 듣는 말이 더 분명할 것인 즉. 내 감정이 눈에보이듯 펼쳐졌지만, 나는 그걸 변명거리로 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만큼 다감한 감정이었다. 난 게리통 노인과 보리솔을 사랑하고 있었던 게다. 보리솔에서 천국의 아련한 잔영을 보았기 때문이고, 그 이미지에 워낙 열렬하게 애착했던 나는 노인의 죽음을 목도함으로써 그 순수한 기억이 영원히 깨져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 P141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가기야 하겠지만 자꾸 출발을 미루고만 있었다. 이렇게 저녁까지 기다렸다. 아멜리에르에서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밤이 내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가 무탈하게 지난 것에 은근히 만족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P142

우리는 아주 천천히 나아갔기에 지름길을 택했음에도 성요한 십자가에 다다른 건 11시나 되어서였다. 고적한 작은고원에 십자가가 교차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우묵하게 들어간 자리에 목재로 된 예전의 십자고상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바위를 파서 만든 벽감은 아직 남아 있었다. - P144

이 바위 발치를 쪼아 만든 계단 세 단도 있었다. 거기서 보면 멀지않은 곳에 아주 부드러운 언덕과 겹치며 아멜리에르가 눈에 들어오고, 더 위쪽 오른편으로는 소나무와 떡갈나무 너머 가파른 오솔길이 나 있는데 보리솔로 바로 올라가는 길이다. - P145

이 오솔길은 내가 말한 바 있듯이 성당에 이르는 길이다.
일견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나무들이 보리솔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성당 오른편, 묘지를 안치한 부드러운 언덕 위로사람들이 있었다. 눈벌 속에, 막 헤쳐놓은 붉은 진흙이 보이는 어떤 무덤 곁에 대여섯 명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두어명씩 짝을 이루어 이미 마을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무덤 위로 뚱뚱한 사내가 삽질로 나무 십자가를 박고 있었다. 그것이 다 세워지자 나머지 참석자들도 사제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들은 전부 성당을 가리고 있는 한 그루 사이프러스 사제관의 비둘기들이 깃든 그 나무 뒤로 사라졌다. 묘지는그 무덤만 덩그러니 있을 뿐 텅 비었다. 

에스칼 꼭대기에 나타난 구름 한 점이 미끄러지듯 계곡 쪽으로 사라졌다. 공기가 갑자기 축축하니 차가워졌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이어서 조용하지만 커다란 보를 이루듯 평펑 쏟아졌다. 무덤은 온통 하얀 눈 속에 사위어갔다.  - P145

계곡 전체가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가벼운 눈송이가 회오리를이루며 엄습하여 나는 한기를 느꼈다.
마차에 도로 올라 들판의 정적을 넘어서 고삐를 리귀제로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자리에 들었다. 시도니가 방에 불을지피러 왔다. 내게 뭘 묻지도 않은 채 그녀는 뜨거운 포도주를 한 사발 준비해주었다. 월계수 향이 감도는 그걸 흔쾌히마시고 나니 한결 나았다. 피가 돌면서 체온을 회복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상당 시간 한기에 떨었다. 시도니는 11시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그녀는 작은 램프를 켜주었다. 말없이 난롯불을 주의 깊게 살피곤 하면서 그 앞에서뜨개질을 했다.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은 평화를 느낄 수 있었으니 온갖 회한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이지 내 안은 그저 순백의 눈이었고, 오죽잖은 내 묵상의기복도 다 지워버리는 불변의 순백이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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