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듀의 사랑
"아니라네. 그 아이가 아프다고 들었네. 들일을 너무 무리하게 해서 벌써 며칠째 앓고 있다고 베르트랑이 말해 주더군. 나는 내일쯤 어떤가 들러 보려 하네. 형편만 되면 오늘이라도 가 볼 참이고" 신부가 대답했다. - P147
신부의 말 가운데 아즈너의 귀에 제대로 들린 것은 ‘그 아이가 아프다네‘라는 말뿐이었다. 그는 잠깐 아무 의미도 없이 망설이는 듯하더니 돌연 단단히 결심을 굳힌 사람처럼 사제관을 빠져나왔다. 자기집 쪽으로 걸어가는가 싶더니 자기 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나쳤다. 좁은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곧장 걸어 내려간 그는 그날 랄리가 사라지는 걸 봤던 바로 그 숲으로 들어갔다. - P147
숲속은 온통 어둑하게 그늘이 져 있었다. 해는 서쪽으로 이미 많이 저물어 빽빽한 나뭇잎들 사이로 한 줄기 빛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 P147
랄리의 집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즈너는 왜 전에는 그곳엘 가본 적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마을이나 이웃의 다른 아가씨들은 종종 찾아다니기도 했으면서 왜 그녀에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즈너의 가슴속 깊은 곳에자리 잡고 있어서 아즈너 자신도 그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참한 삶을 보고야 말 것같은 두려움! 아즈너는 그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그녀에게 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픈 지금! 그는 곧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그 허물어진 현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 P147
폭풍우
그들은 격렬하게 쏟아지는 억수 같은 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팔에 안겨 폭풍우의 굉음을 들으면서 웃고 있었다. 그 어둡고 불가사의한 방에서 그녀는 뜻밖의 경이로운 존재였다.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타고난 권리를 처음으로 깨달아 가는 단단하고 탄력 넘치는 그녀의 육체는 태양이 이끄는 대로 세상의 영원한삶을 위해 자신의 숨결과 향기를 거침없이 풍기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백합 같았다. - P206
꾸밈도 거짓도 없는 그녀의 충만하고 아낌없는 열정은 그의 깊고깊은 관능의 본성을 꿰뚫어 들어와 그 속에서 감응하는 하얀 불꽃같았다. 그도 이런 놀라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부드럽게 애무하는 그의 손길에 그녀의 가슴은 황홀한 듯 전율하며 거침없이 그의 입술을 원했다. 그녀의 입에서 희열의 신음 소리가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마침내 그가 온전히 그녀를 소유했을 때, 두 사람은 삶의 신비라는 그 아스라한 경계에서 한 몸이 되어 혼절한 것 같았다. - P206
으르렁대는 천둥소리가 멀리 사라져 갔다. 널빤지 지붕 위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비가 그들을 나른한 졸음과 아스라한 잠으로 유혹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P207
보빈트와 비비도 마음이 놓이면서 즐거워졌다. 세 사람이 식탁에앉았을 때 끊임없는 웃음소리가 얼마나 크게 계속되었는지 저 멀리 라발리에르 동네에 사는 사람도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 P208
클라리세로 말할 것 같으면 남편의 편지를 받고 황홀할 정도로 기폈다. 그녀와 아기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사교 생활도 마음에 들었다. 많은 옛 친구들과 지인들이 그 빌록시 베이에 살았다. 결혼 이후처음 맛보는 자유로움이 아가씨 때 느꼈던 기분 좋은 자유를 다시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는 헌신적이었던 만큼 그들의 친밀한 부부 생활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당분간은 기꺼이 그녀 마음대로해나갈 용의가 있었다. - P209
그렇게 폭풍우는 지나갔다. 모두가 행복했다. - P209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
뭔가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너무도묘해서 뭐라 말하기도 어려운 그것. 하지만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하늘에서 나와 대기를 가득 채운 온갖 소리와 향기와 색채들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그것. - P221
그녀의 가슴이 격정적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소유하려는 그것.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밀쳐 내려고 애써 보았지만 가늘고 흰 두 손이 그렇듯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그 노력을 포기하고 말았을 때 보일 듯 말듯 살짝열린 그녀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 말을 나지막이 여러 번 속삭였다. "자유, 자유, 자유!" - P206
하지만그녀는 그 쓰라린 순간을 넘어 오롯이 그녀 자신의 것으로만 지속될 앞으로의 기나긴 세월을 보았다. 그녀는 두 팔을 활짝 열고 그 시간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앞으로 다가올 그 세월에는 그녀를 대신해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맹신하면서 집요하게 그녀의 결심을 꺾으려는 그 어떤 강력한 의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짧고 강렬한 이 정신적 각성의 순간에 돌이켜 보면, 친절한 의도에서건 잔인한 의도에서건 상관없이 타인의 의지를 꺾는 그 행위는 범죄나 다름없었다. - P222
그때 누군가가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여행으로 인한 약간의 피로감을 보이면서 여행 가방과 우산을 들고 태연하게 들어선 이는 바로 그녀의 남편 브렌틀리 맬러드였다! 그는 사고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귀청을 찢을 듯한 조세핀의 비명 소리와 맬러드 부인이 그를 보지 못하게 막으려는 리처즈의 재빠른 움직임에 깜짝 놀란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리처즈는 너무 늦었다. 나중에 의사들은 너무나도 엄청난 기쁨이 불러온 심장마비가 그녀의 사망 원인이라고 말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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