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혐오의 정치: 실제, 이론, 역사

혐오: 신뢰할 수 없는 감정
혐오의 ‘원초적 대상‘은 인간의 동물성과 유한성을 일깨워주는 존재들이다. 배설물과 체액, 시체가 여기에 포함된다. 끈적거린다든가 냄새가 나고 진액이 흘러나오는 등, 체액이나 시체를 연상시키는 동물과 곤충들도 혐오의 원초적 대상이 된다. 로진은 모든 혐오의 근저에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의 오물과 악취에 대한 혐오가 깔려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이 가진 모든 동물성이 혐오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힘이나 민첩성 등은 혐오스럽지 않다."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은 죽음 및 부패와 관련된 동물성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혐오란 모든 인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동물적 속성에 대한 기피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속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자신을 오염시킨다고 느끼며, 그러한 속성들을 숨기고 싶어 한다. - P52

그런데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는 이후 이성적인 검토를 거의 거치지 않고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확장된 혐오를 ‘투사적 혐
‘오‘라고 부른다. 로진은 투사적 혐오가 작용하는 원칙을 "공감적 주술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그처럼 미신적인 개념 중 하나는, 만일 A가 혐오스러운 대상인데 B가 A와 비슷하게 생겼다면 B 역시 혐오
스럽다는 것이다. - P54

역겨운 속성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전가하는 투사적 혐오는 여러 형태를 취하는데, 이른바 혐오스러운 집단이나 사람을 어떻게든 혐오의 원초적 대상과 연관시킨다는 점만은 같다. 어떤 경우에는 해당 집단이 원초적대상과 실질적으로 가깝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불가촉천민" 중 일부는 변소를 청소하거나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었다. - P55

하지만 혐오가 확장되는 보다 많은 경우에는 
망상이 개입한다. 이는 악취와 진액, 부패, 세균이 많음 등 원초적 대상에서 역겹다고 느껴지는 속성을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전가하는 방식이다. 
전형적인 경우 이러한 투사에는 아무런 실제적 근거도 없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끈적끈적하지도, 구더기와 비슷하지도 않다. 그러나 히틀러 본인을 포함한 독일의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끈적끈적한 구더기라고 말해왔다. 흑인들이라고 해서 다른 인종보다 체취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원초적 대상과 연관이 있다는 많은 사람들도 따져보면 더럽다거나 오염된 존재로 여겨질 이유가 전혀 없다.  - P56

사회에는소수자들에게 낙인을 찍는 수많은 방식이 있으며, 혐오만이 낙인을 찍는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혐오는 낙인을 찍는 강력하고도 중심적인 방식이며, 혐오가 사라지는 경우에는 위계질서도 함께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인종적 소수자와의 신체 접촉을 피하는 일이 사라지면 인종차별도 함께 사라진다.  - P56

성애의 영역에서 혐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섹스에는 체액의 교환이 포함되며, 섹스를 통해 인간은 천상의 초월적 존재가 되기보다 육체적 존재로서 흠집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섹스의 영역은 동물적이고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애증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안한 공간이다. 섹스도중 인간이 맞닥뜨리는 정액, 땀, 배설물, 생리혈등의 신체적 물질은 많은 경우 혐오스러운 오염원으로 간주된다. 그런 만큼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는 성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P57

따라서 투사적 혐오가 성적인 영역에서 지배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아니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정한 성적 행동을 하는 집단을 "정상적"이고 "순수한 성적 행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조하여 혐오스럽고 병적인 존재로 여겨왔다("정상적"이고 "순수한" 성적 행동을 한다는 사람은 주로 누군가를 혐오스럽고 병적이라고 여기는 사람 자신, 혹은 그가 속한 집단을 포함한다). 
이러한 낙인찍기는 여러 형태를 취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성관계를 맺을 때 발생하는 투사적 혐오의 한 형태로 여성혐오가 나타난다. 성관계를 맺을 때 남성은 여성과 체액을 교환하며, 이때 체액을 받아들이는 여성에게 불편감을 느낀다. 혐오는 남성이 그 불편감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할 때 발생한다. 정말이지 남성들은 여성혐오를 통해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불편감을 해소해왔다. 남성들은 냄새 나고, 진액이 흘러나오고, 의문스러운액체로 가득 찬 존재라며 여성을 경멸적으로 묘사했고, 이처럼 여성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동물성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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