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ㅡ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좌절
1. 순진한 하지의 순진한 계획~~
2.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
독촉중협의 전말
오늘은 384쪽까지...


사실 하지에게는 독자적인 정책 결정 권한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군사적으로는 태평양전쟁의 영웅이자 미군 내의 전설적 인물인 맥아더의 태평양 미육군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US Pacific Forces)의 예하에 있었으며, 맥아더의 상급자인 합동참모본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야 했다. 그는 육군원수 맥아더가 지휘하는 방대한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예하 여러 개의 군(Army) 중 10군 예하에 있던 24 군단 사령관에 불과했다.  - P365

군사적 결정은 맥아더와 합동참모본부의 권한이었으며, 외교적결정은 국무부와 3부 조정위원회의 권한이었다. 권위적이며 신적 존재였번 맥아더, 관료주의적 장벽이 높은 육·해군 엘리트들의 집합체인 합동참모본부, 국제적 합의와 절차를 중시하는 국무부, 외교·군사적 입장을 조율하는 3부 조정위원회라는 다중의 장벽을 건너뛰고 하지가 독자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대한정책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P365

그러나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으로 추상적 대한정책이 결정되고, 1945년 8월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38선 분할 결정이 이뤄진 이후 대한정책의 방기와 방임, 무책임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현지 주둔군 사령관인 하지의 독자적 재량과 현상 대응적 조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카이로선언에 따라 해방국이 되어야 할 한국은 점령국으로 취급되었고, 적대적 점령지가 되어야 할 일본에는 간접통치하에 주권 정부가 기능하고 있었다. 한국은태평양 지역에서 
유일하게 군정이 실시된 지역이며, 적대적 점령하에 주권 정부가 부인된 군사통치 지역이었다. 카이로선언이라는 국제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한국인이 어떠한 국제적 합의나 절차에 대한 존중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 P365

맥아더는 일본 점령과 소련의 대일 점령 참가 방지에 여력이 없었으며, 유일한 관심사는 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와 일본 점령이라는 성공을 발판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이었다. 
합동참모본부는 독일과이탈리아, 일본 문제 등을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국 국무부는 유럽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이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관심을 가졌다. - P365

국무부 극동국에는 아직 한국 데스크나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정책과 정책 결정이 부재한 사이 하지의 판단과 조치가 정책을 대체하게 되었지만, 도쿄와 워싱턴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한반도 문제는 3성 장군의 자유재량에 따라 굴러가게 되었다. 또한 전반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대소 봉쇄적이며 대결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하지의 대결적이고 현실주의적 조치들이 맥아더의 묵인과 워싱턴 매파의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를 받게 되었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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