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마음>
어설픈 동정심이 남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 처음이자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 문제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호프 밀러가 대체 어디서 멈출 수 있었을까? 주위에서 호프 밀러를 등 떠밀듯 수레바퀴 위에 태우고 빙빙 돌리듯 가만 내버려 두질 않는데...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이용해서 자꾸 몰아간 느낌이랄까. 한발짝 멀어지려 하면 와서 매달리고 매달리고...
에디트, 케케스팔바, 일로나, 심지어 콘도어까지도...

난 왜 이 작품에서 호프 밀러만 잘못한게 아니란 생각이 자꾸 드는 걸까?





모두가 나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다행히도 나팔소리가 나를 살려주었다.
훈련이 재개된 것이다. 대열이 흩어지면서 소대별로 모였다. 그 순간을 이용해서 페렌츠는(어째서 가장 멍청한 놈들이 가장 착한 걸까?) 우연인척 말을 몰고 와서는 내게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말게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러나 순박하게 내게 말을 건넨 그는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네 일이나 신경 쓰게!" 
나는 거칠게 그에게 내뱉고는 말 머리를 획 돌려버렸다. 

그 순간 나는 어설픈 동정심이 남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직접 체험했다. 처음이자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다. - P309

젊고 경험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지금까지 그리움이나 사랑으로 인한 아픔이 가장 큰 심적 고통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그리움이나 상심보다도 더 쓰디쓴 고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원치 않는 사랑을 받는 고통 그리고 그 집요한 열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이 뿜어내는 불꽃에 타버리는데도 그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 그 불꽃을 꺼줄 힘도 능력도 없다는 무력감에서 나오는 고통이었다. 스스로 불행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열정을 통제할 줄 알게 된다. - P281

그러나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영혼이 그런 위험을 감지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그녀의 갑작스러운 포옹을 뿌리쳤던 것이다. 언제나 본능은 깨어 있는 이성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법이다. 에디트의 강압적인 사랑을 뿌리치던 그 충격적인 순간에 나는 이미 어렴풋이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내게는 에디트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불구인 그녀를 사랑할 힘도 없고, 짜증 나는 그녀의 열정을 참아줄 만큼의 연민조차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이다. 
에디트를 뿌리치는 그 순간부터 나는 빠져나갈 
구멍도,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 불합리한 사랑으로 인해 적어도 한 사람은 불행해져야 했다. 그리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불행해질 수도 있었다. - P285

그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그가 내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나를 찾아와준 덕분에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도망쳐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평생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을 거예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는 법이거든요. 자, 이제 건너갑시다. 이쪽이에요. 친구."
- P385

... 노인이 내게서 떨어지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디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반쯤 열린 입술이 얼마나 키스를 갈망하고 있는지 느낄수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숙여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것이 우리의 약혼식이었다. 나는 결코 의무적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감정에 이끌려 그렇게 한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의도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나는 그 소소하고 순수한 입맞춤을 후회하지 않았다. 
행복에 젖은 그녀는 전처럼 요동치는 가슴을 거칠게 들이밀지도 않았고 나를 꽉 움켜잡지도 않았다. 
그저 큰 선물을받는 것처럼 공손하게 자신의 입술로 나의 입술을 받아줄 뿐이었다. - P402

절망과 분노가 가득한 에디트의 흐느낌과 그녀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멀어져가는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날 밤 내 눈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감동의 안개는 그 한순간에 걸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나는 모든 것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가엾은 에디트는 결코 완치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나에게 기대한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연민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보잘것 없고 하찮은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일을 정확하게,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녀에게신의를 지켜야 할 때였다! 지금에야말로 나는 그녀를 도와줘야 했다! 얼른 다른 사람들을 뒤따라가서 침대맡에 앉아 그녀를 위로하며 ‘훌륭하게 걸었다‘, ‘반드시 완치될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그토록 절망적인 거짓말을 할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그것은 간절하게 애원하다가도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눈동자에 대한 두려움, 격정적인 마음이 불러오는 초조함에 대한 두려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타인의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군도와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범죄자처럼 그 집을 도망쳐 나왔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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