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가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17쪽)

이처럼 오지랖 넓은 그 지인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이런 부류의 사람을 알고 있고, 거칠게 밀어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들의 정성 어린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체념하고 그의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 P8
그러나 나의 이러한 무심한 태도가 그를 더욱 자극했는지 그는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나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저 사람, 군사행정부장 호프밀러 씨잖아요. 아시죠?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받은 사람이요." 나에게서 기대한 만큼의 놀라운 반응이 보이지 않자 그는 애국독본을 읽듯이 열정적으로 호프밀러 기병중대장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기병대에서 장교로 있다가 전쟁터에서 피아베 강상공을 정찰하던 중 혼자서 세 대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공을 세웠고, 기관총부대에서는 사흘 동안 일부 전선을 사수해냈다는 이야기를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지만) 온갖 세세한 내용까지 덧붙여가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야기 중간 중간에 어째서 내가 카를 대제가 손수 오스트리아 최고의 훈장을 수여한 이 대단한 인물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지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 P9
그게 전부였다. 한 번의 눈빛 교환. 곧 잊혔을 일이지만, 우연찮게나는 바로 그다음 날 작은 모임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턱시도를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어제의 편안한 차림보다도 더 눈에 띄고 기품 있어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여러 사람들 틈에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만이 교환할 수 있는 그런 미묘한 미소였다. 내가 그를 알아본 것처럼 그도 나를 알아보았고, 우리는 둘 다 어제 헛물을 켠 오지랖 넓은 친구에 대해 똑같이 불쾌해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처음에는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을 피했지만, 주위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서로를 계속 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 P10
나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서려던찰나, 여주인이 만찬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왔고, 반찬 중에는 자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모두들 돌아갈 채비를 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현관에서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우린 이미 같은 친구로부터 간접적으로 소개를 받은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며 그가 미소를 건넸다. 나도 미소로 답했다. "아주 자세하게 받았습니다." "내가 아킬레우스 같은 대단한 영웅이라고 허풍 떨지 않던가요? 내 훈장을 가지고도 한참 자랑했겠죠?" "비슷했습니다." "그러게요, 내 훈장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더라고요. 당신의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특이한 친구예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참 괜찮으시다면, 함께 좀 걸을까요?" 우리는 함께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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