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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모든 열정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2
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정소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평점 :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
비타의 소설은 <사라진 모든 열정>이 '흄세 시즌 5: 할머니라는 세계'로 출간이 되었고, 민음사에서는 <모든 열정이 다하고>라는 제목으로 한 권이 나와 있다. 제목으로만 보면 <모든 열정이 다하고>가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남는다.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면 절대 비타를 피해갈 수 없다.~~^^ 요즘 말로 재혼 가정에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버지니아 울프와 대단한 귀족 가문, 가정 교사에게서 교육을 받고 자란 비타는 태생부터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서로 너무 달랐기 때문에, 거기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겠지! "나처럼 고상한 체하는 사람에게는 500년 전의 세계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따라가는 일이 무척 낭만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마치 오래된 황금빛 와인처럼~~~."이라고 고백한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 레너드와 바네사 언니를 제외하고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비타가 유일했다고 했고, 두 사람의 인연은 열렬했던 짦은 사랑이 지나고 난 후 버지니아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비타 색빌웨스트는 우리에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의 모델로 알려져 있지만, 난 아직 <올랜도>를 읽지 않았고 읽어보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사실 자신은 없고... 그런데 비타의 책은 그에 비해 너무 너무 잘 읽힐 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 멋지고 또 재밌었다. 역시 울프보다 더 인정받는 작가였다는 것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 <사라진 모든 열정>에는 비타와 울프의 그림자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작품의 주인공인 데버라 슬레인 백작 부인은 인도의 총독이었고 수상까지 역임한 정계의 거물이었던 슬레인 백작이 94 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뜨고, 자식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견을 일거에 물리치고!!! 88 세라는 어마어마한 나이에 혼자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을 이루게 된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미 살고 싶은 집도 무려 30년 전에 봐 둔 상태이고 집 주인의 특이한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들에게 헌신한 조용한 내조의 주인공이었던 백작 부인은, 처녀 시절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 본 적은 없고, 그 시절 누구나 그러하듯 떠밀리듯 청혼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고 남편을 사랑하게 되고 여러 자식들이 태어나 돌보고, 또 백작이자 인도 총독이었고 수상까지 역임한 남편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내조에 임하였다. 자신의 열정은 가슴 속에 묻어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남편 헨리의 세속적인 열정은 백작 부인을 가시밭길로 몰아댔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녀의 희망을 조용한 어조로 뭉개버렸다.
세상을 바라보는 헨리의 관점은 모든 면에서 그녀의 관점과 상반되었다.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두 사람의 관점은 그렇게 표현될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헨리는 자신의 신조를 전혀 숨길 필요가 없는 반면 그녀는 조롱과 수치에서 자신의 신조를 지켜야 했다는 것뿐. (본문 중에서)
그녀가 사색하는 삶을 갈망하듯이 헨리는 행동하는 삶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정말이지 하나의 세계가 두 쪽으로 분할되었다고 하겠다. (본문 중에서)
그러자 그녀는 진정 덫에 걸린 기분이었고 혼비백산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았다. 신처럼 초연한 그의 우월감, 애정이 담겼지만 어쨌든 우쭐대는 나름의 가정, 그의 손쉬운 친절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비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가 정말 미웠다. 비난할 수가 없었다. 당연시해도 되는 것들을 당연시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런 식으로 여자들과 동조하여 그녀를 속이고 그녀가 선택한 삶을 빼앗는 전반적인 공모에 동참한 것이니까. (본문)
그녀는 페미니스트도 아니었다. 상상의 순교 같은 사치에 빠지기엔 지혜로운 여자였다. 자신의 삶 사이의 균열은 남자와 여자의 균열이 아니라 일하는 자와 꿈꾸는 자의 균열이었다. 그녀는 여자고 헨리는 남자라는 사실은 정말이지 우연적인 문제였다. 자신이 여자라서 상황이 조금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본문 중에서)
부자연스럽고 망측한 생각이 머릿 속에서 떠다녔다.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아이만 낳지 않았다면.' 하지만 비통할 만큼 헨리를 사랑했고, 감상에 빠질 만큼 아이들을 사랑했다. (본문 중에서)
사실 비타는 외교관 해럴드 니컬슨과 결혼하였지만 각자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개방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결혼을 했지만 버지니아 울프와 연인 관계이기도 하는 등의 양성애자였고, 그 전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남성복을 입고 남편 행세를 하고 운전도 직접 하는 등의 파격적인 연애로 세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존재였다. 그래서 작품에서 보여주는 슬레인 백작 부인의 삶은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1931 년 발표하였는데(물론 울프와 레너드가 운영하던 호가스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그 해는 비타가 4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엄격히 분리가 되어 있는 사회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아간 주체적인 여성이었던 비타가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이라는 휘장을 두르고 있는 88 세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리고 그 여성의 삶은 여성으로서 강요당하는 삶의 부당함을 인정하지만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이. 그러나 한 편으론 마냥 관습적이지는 않다. 결국 슬레인 백작 부인은 '자기만의 집'을 이루어내니까! 여자가 순수하게 자신만의 의지로 '자기만의 집'을 갖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어야 하는 것일까? 여자가 '자기만의 집'을 가질 자격은 88 세쯤이나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일까?
슬레인 백작 부인은 88 세라는 나이이지만 비로서 '자신만의 집'(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에서 먼 시간 속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생각한다. 헨리와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놓인 부당한 상황들에 어떻게 대처했었는지... 어떻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부당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타개하기보다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지혜로운 여인이었다는 것을...
비타의 정신을 내려받았지만 실제로는 비타와 너무도 다른, 그 시절 여타의 여성들의 삶과 비슷한 길을 걸어간 인물로 그려져 있다. 가슴 속에 열정은 묻어둔 채로... 두 여인이 서로 상반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타가 그린 책의 주인공으로 부족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자식들의 제안 아닌 제안을 물리치고 런던 북부의 햄프스테드에 '자기만의 집'을 갖게 된 슬레인 백작 부인. 모든 회환과 혼돈을 뒤로 하고 백작 부인은 이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저 편안하고 조용하게 마무리를 하고 싶을 뿐이다. 주위에는 예의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집 주인을 비롯한 나이 많은 친구 몇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란 것이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던가! 단순하고 평온함을 찾아 떠나왔건만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허락되지 않는 단순함이라니... 인생의 복잡함이란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인도 총독으로 재임하던 때, 잠시 공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피츠 조지 씨 - 그는 현재 부유한 은둔자로 불리며 엄청난 자산가이고 누구나 탐낼만한 아름다운 유물을 어마어마하게 수집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옛날 백작 부인의 열정을 간파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 로 인하여 그녀의 남은 시간은 원치 않는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숙제를 떠안기고 떠난 피츠 조지 씨로 인하여 독자는 마지막 순간 다시 비타가 마련한 자리에 원치 않는 초대를 받은 듯 백작 부인의 황망하고 황당하기만한 상황에 깊이 동화된다. 지극히 헨리의 표본과도 같은, 그러나 그녀와는 닮지 않은 자식들과의 관계에도 회오리 바람이 몰아친다. 마지막에 증손녀와의 대화도 이미 너무 늙어버린 백작 부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시련이다.
천천히 읽어 나가노라면 아름답고 가슴을 적시는 문장들이 자꾸 와서 콕콕 박힌다. 그 바람에 어느 새 보랏빛 밑줄이 쫙쫙~~ 하이라이트가 늘어나고 그럼에도 백작 부인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자식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행하는 일들로 속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비타 색빌웨스트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인데... 그녀의 다른 소설들은 언제나 만날 수 있으려나! 다른 작품으로 또 만나고 싶다. 그리고 흄세 소장 욕구도 뿜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