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를 처음 알게된 대부분의 아이들은 경우가 보여주는 배려를 낯설어했다. 경우의 친절에 무슨 꿍꿍이가있으리라 예상하고 과하게 날을 세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경우의 행동에 어떤 나쁜 의도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경우는 누군가의 경계를 허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니까. - P255
내가 경우를 어떻게 생각했던 것인지 경우가 살아 있을 때보다 그애가 죽은 후에 더 자주 곱씹었다. 경우가 매번 자발적으로 나서 준다고 여겼으나 내가 그애의 등을 떠민 적은 없었는지, 그애의 등뒤에 숨어서 뭔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종용한 적은 없었는지 생각해보았다. - P255
왜 저 아이는 사랑받아본 아이처럼 행동할까. 나는 궁금해했다. 어째서 경우의 존재에 대해 순수하게 감동하고고마워하는 대신 의아해하고 얼마쯤 수상하게 여겼을까. 경우와 가장 친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경우가 집을 구하고, 그애의 소원대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더라도(경우라면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때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두운 마음 한편에는 저렇게 가식적이고 답답한 애는 도무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그애에게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며 경우에게 정을 떼기 위해 마음속으로 고군분투했다. - P256
세탁, 나는 나 자신이 과거를 세탁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약간 징그럽다고 느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잘 모르는 도시에서 새출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바로 이 이유였다. 경우가 죽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희미한 웃음인지 울음인지가 입에서 비어져 나왔다. - P257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후회를 곱씹는 일에만 성실히 복무했다.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삶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소심한 방식으로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건 경우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식일 테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삶이라고 내가 아무리 주장해봤자 나는 살아 있다. 아무리 떨어도 내 체온은 36.5도인 것이다. 이 반성 없는 몸으로 앞으로도 살아가겠지. 이런 내가 이호에게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형." 이호가 내게 말했다. - P261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심연에서 바람이 휘돌며 서서히 내 몸을 녹였다. 이런 온기를 오래전부터 꿈꿔왔지만 막상 따스함을 느끼니 내게는 이런 안온함을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하지만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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