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가여워하고 애처로워하는 마음을 서운함이 앞질렀다. 내가 희생한 보람도 없이 너무도 쉽게 아버지를 용서하고 상황을 무마해버린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 P61
기묘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날의 폭행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부부동반 모임에도 빠짐없이 나갔고 결혼기념일에는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다음 날에는 다시 폭행, 그 다음 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이런 일관성 없는 일상에 대해서라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반복되어온 일이라 초연해질 법도 한데 나는 점점 더 심한 멀미를 느꼈다. 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내가 유별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60
경우는 슬금슬금 집을 정리했다. 망가진 가구들과 낡은물건들을 내다버렸다.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집이 쾌적해졌다. 경우를 도와 거울이 깨진장대와 말라 죽은 지 오래인 화분들, 고장 난 선풍기, 아기침대와 모빌, 다리가 부러진 책상 등을 치우고 나니 반지하 집이 훨씬 넓어졌다. - P88
"우리집"에는 수시로 전기와 가스 공급이 중단된다는고지서가 날아왔다. 집에서 계속 머물기 위해 경우는 아이들에게서 돈을 거둬 가스비를 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기, 박스는 박스끼리 모아서 버리기. 집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간단한 규칙을 정립하기 위해 경우는애들과 매일 싸워야 했다. 하루만 손을 놓고 있으면 금세 원상복귀하는 집에서 경우는 혼자 부지런하게 살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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