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고트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납작한 달팽이 코에 턱수염, 거기다 땅딸막한 몸에 과도한 실망을 안겨준 독특한 발성법까지.
무엇하나 작품과 어울리는 외형이 아니다보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뿐더러 작품에 대한 매력도 반감되고 말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외모에 대한 환상이 있기 마련인지라 심하게 감정이입된다.

스완 부인은 며칠 전에 "몇몇 사람들끼리 하는 작은 회식"에 식사를 하러 오라며 내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런데 그날 온 사람은 무려 열여섯 명이나 됐고, 그들 가운데 베르고트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스완 부인은 여러 손님들에게 한 것처럼 내 이름을 ‘호명했고‘, 갑자기 내 이름 다음에 방금 내 이름을 부른 것과 같은 방식으로(마치 우리가 단지 서로를 소개받는 데 만족해하는, 오찬에 초대받은 단 두 명의 손님이라는 듯이) 그 온화한 백발 ‘시인‘ 이름을 발음했다. 베르고트라는 이름은 누군가가 나를 향해 발사한 권총 소리처럼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려고 인사했다. 내 앞에서 총 한방이 발사되고 그 연기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가는데도 프록코트 차림으로 멀쩡히 서 있는 마술사처럼, 젊고 투박하며 키가 작고 다부진 체형에 근시이며 코가 달팽이 껍데기 모양으로 붉은, 검은 턱수염 남자가 인사에 답했다 - P215
나는 죽을 듯이 슬펐다. 왜냐하면 지금 재가 되어 버린것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처량한 늙은이만이 아니라, 그의 쇠진한 성스러운 몸 안에 내가 머물게 할 수 있었던 거대한 작품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부러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전당처럼 축조해 놓았던 그 몸, 그러나 내 앞에 있는 납작코와 검은 턱수염을 가진 이 키 작은 남자의 혈관이나 뼈, 신경 마디로 채워진 땅딸막한 몸 어디에도 그런 아름다움을 위한 자리는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 P215
나 자신이 마치 종유석처럼 천천히 섬세하게 한 방울 한 방울 그의 책들이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축조했던 베르고트 전체가, 지금 달팽이 껍데기 모양 코를 보존하고 검은 턱수염을 활용해야 하자 그런 베르고트는 단번에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가없게 되어 버렸다. 마치 우리에게 제시된 요소를 불완전하게읽고 또 그 총계가 어떤 숫자로 나타나야 하는데도 그런 사실은 고려하지 않고 문제를 풀어 결국에는 그 답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 P216
코와 턱수염은 내게 베르고트라는 인물을 완전히 다시 구성하도록 강요하면서도 일종의 활기찬 자기만족 정신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생산하며 분비하는 듯 보여 그만큼 불가피하고 거추장스러웠는데, 이는 어떤 점에서 공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은 내게 잘 알려진 책들을 통해 널리 퍼져 있던 그런 온화하고 성스러운 지혜가 깊숙이 배어든 지성의 유형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그의 책에서 출발했다면 이 달팽이 껍데기 모양 코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코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나는 베르고트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으며, 결국에는 바쁜 엔지니어의 정신 상태에 이르게 될 것만 같았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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