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감정이 좋을 리 없지요. 그리고 일본에 대하여 향수를 가지는 사람을 보면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요. 징병과 징용, 위안부, 농토를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도시를 헤매던 군상,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 내 산천을 찾겠다고 만주 벌판 눈보라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고문과 인체실험으로 사라져간 사람들, 죄 없이 일본인 앞에서 떨어야 했던 어린 영혼들의 상처.……… 일본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겠습니까.  - P122

이름도 우리말도 없애버린 그들, 반일의 피는 방방곡곡에서 들끓고, 꽃이며 심장이던 젊은 학도들은 결코 순종하지 아니하여 전쟁 말기에는 유치장이 미어졌습니다. 아주 소수의 친일파는겨레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일본인이 먹다 남긴 찌꺼기나 얻어먹는 신세, 사실 마음 놓고 거들먹거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이광수(李光洙)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미미한 친일파가 해방이 되면서 숙청을 당하기는커녕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교묘히 일본을 답습하고 나라를 휘어잡았습니다.  - P122

허나 오늘 일본에 향수를 느낄 당자가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요. 그러나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대단한 것입니다. 식민지 사관의 뿌리가 아직 뽑히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본의 회유정책에 힘입고 혹은 개인의 이익을 계산하는 새로운 친일파가 대거 등장했습니다. 참 그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반일을 논하면 소탕하자는 기세니까요." - P123

원주로 옮겨 온 것은 20년 전의 일입니다. 딸아이와 손자가 남편도 없이 애비도 없이 시가에 살고 있었기에 울타리라도 되어주자고 서울 살림을 걷고 원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 P128

며칠 전에 문막에 있는 ‘녹야‘라는 음식점에 점심을 먹으러 간일이 있습니다. 딸아이가 문막의 지리를 환히 알고 있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고.
"원주 있을 때 세희 데리고 여기 강가에 가끔 왔어요."
나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 이곳은집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을 거예요. 어린것 손잡고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왔었는가. 강물을 바라보며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혹했던 세월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 P128

당시의 원주는 추운 곳이었습니다. 삭막한 군사도시에는감나무는 물론 백일홍도 없었습니다. 

어떤분은 내가 글 쓰기위해 원주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내게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구동의 뜨락은 꽤 넓었고 그것이내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삶은 준열하고 나날의 노동 없이는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가 다 빠지고 철색으로 변한 딸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속의짙은 피멍입니다.  - P128

그리고 언어가 지닌 피상적인 속성은 지금이 순간에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몸부림,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언어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그게 문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절, 거부하고 포기한, 극한적 고독의 산물이 [토지]였을 겁니다. - P128

자유스러워야 순수한 글도 쓰지요
- 타협보다 죽음 각오하며 토지 완간

지난 8월 15일 새벽 2시, 마침내 거대한 마침표를 찍은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문학사의 테두리를 넘어 세계문학사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작가 박경리 씨가 『토지』에 바친 시간은 장장 25년. 43세에집필을 시작, 어느덧 고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한 작가가 25년에 걸쳐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16권의 방대한 부피로 담아낸 유례가 여지껏 세계문학사에 없었다. 보통 사람이면견딜 수 없었을 그 많은 세월의 긴장을 작가 박경리 씨는 ‘타협보다는 죽음을‘이란 각오로 버티었다.

- 이홍섭 기자, [생명력 없는 일본 문화], 《강원일보》, 1994년 10월 23일자.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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