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는 런던을 떠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늘 웃는 얼굴로, 차분하고 음악과 독서에 관심이 많은 옛날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연인의 품에서 자신을 떼어 낸 제레미에 대해 원망스러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자기를 속인 남자를 그리워하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험담과 상을 당한 듯 슬픔에 젖은 식구들의 얼굴을 모른 척 당당하게 대했다. 곁에서 보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조차 잔소리나 충고를 할 구실을 찾지 못할 정도로 흠집 하나 없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한편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도와주거나 보호해 줄 상황이 되질 못했다. 암이 빠른 속도로 번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P148

로즈의 행동에서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자기방에처박혀 몇 시간이고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깨알같은 글씨로 공책 열두 권도 더 넘게 글을 쓴 다음, 열쇠로 잠가 잘 보관해 두었다. 

로즈가 편지를 보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가장 두려워했던 제레미 소머스로서는 그녀의 글 쓰는 버릇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이 정신을 차려 넌덜머리나는 빈의 테너 가수를 잊기로 한 줄 알았다. 
그렇지만 로즈는 그를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 속삭임 하나하나를 확실하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서 딱 하나 지운 것은 농락당한데서 온 실망감이었다. - P148

디프테리아 전염병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바람과 습기를 피해 급한 대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 지역 치료사들이 잔인하고도 쓸데없이 칼로 상처를 내 피를뽑아 그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그 나라는 첫인상부터 끔찍했다. 
봄과 뒤이어 온 여름은 그곳의 나쁜 인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주었다. 촌스러운 시골 분위기와 해가 쨍쨍 내리쬐는 정오에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로즈는 런던을 잊고 새로운 상황에 최대한 적응하고자 마음먹었다. 회사 이름에 걸맞은 집을 구해 영국에서 가구들을 가져오도록 로즈는 오빠를 설득했고, 오빠는 회사를 설득했다. 로즈는 그 문제를 회사의 체면과 권위의 문제로 밀고 나갔다. 그렇게 중요한 회사의 대표가 허술한 호텔에서 묵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 P150

18개월 후에, 어린 엘리사가 그들의 인생에 들어왔을때, 남매는 세로 알레그로의 큰 저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미스 로즈는 옛 애인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놓고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권 계층을 공략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이후 몇 년 동안 발파라이소는 급성장을 거듭했으며, 그녀가 과거를 잊는 것과 맞먹는 속도로 빠르게 현대화 되었다. - P150

로즈는 활력이 넘치는 행복한 모습의 여자로 변해 있었으며, 11년 이후에는 제이컵 토드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 이르렀다. 퇴짜를 맞은 사람은 가짜 전도사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 옛날 뜨거웠던 열정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홀로 밤을 지새우는 적막 속에서 사랑의 열병을 떠올리며, 상상 속에서 칼 브렛츠너와의 로망스를 영원히 간직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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