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엄마됨!
양립하기 힘든 두 명제 사이에서 언제나 여성들은 방황한다. 무언가를 강요받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해볼 시간적 여유 따윈 주어지지 않는다.
흔히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다 보면‘이라고 시작되는 대화를 시작하면 남자들은 변명이라는 말로 매도한다. 엄마도 부족한 사람이지 신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어이없는 말이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엄마를 주었다‘고 하는 종류의 말이었다. 내 엄마도 결코 신과 같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엄마로서의 어떠한 위로나 인정, 사랑을 충족해주지 못했는데 나에게 강요하는 ‘신‘과 같은 존재성이라니!

어린 아이가 둘이 되었을 때 나는 ‘집‘이라는 곳에서 하루 빨리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케어하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건데 그게 내 발등을 찍은거란걸 곧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그저 웃고 말지만 절대 다시 살고 싶진 않다.

요즘 아들과 통화하다 물어볼 때가 있다.
뭐 필요한거 있어? 엄마가 보내줄게.. 이러면
다 필요없고 내 집에 엄마만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다. 미친! 이놈아 장난하냐! 엄마도 늙었다!
‘신‘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엄마‘를 만들어줬을까?
아마 끝없는 인간, 특히 남자 인간들의 요구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수전 그리핀의 <페미니즘과 엄마됨>을 읽고 있다.
수전 그리핀은 유명한 작가이자 시인이라고 한다.
에코 페미시즘에 영감을 주 고전 《여성과 자연》이 2001년 출간이 되었다는데 도서관에서도 서점에서도 전혀 찾을수가 없다.

수전 그리핀의 이 글은 매 문장이 공감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핀은 자기 아이가 ‘귀찮고‘,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으며 여전히 터부시된다.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려면 여전히 많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힘든 건 힘든 거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끊임없이 나의 노동력을 요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존재인데 어떻게 매번 사랑스럽기만 하지? 그게 더 이상한 일이잖아.

˝우리 문화에서의 엄마됨의 정의에 따르면,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엄마는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그녀 자신은 사라져버린다.˝(81~82)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다. 희생은 강요하면 안된다. 절대로!



ㅡ페미니즘과 엄마됨, 수전 그리핀

엄마됨이라는 주제에 관한 글은 거의 쓰인 적이 없다.
아이를 낳고 무엇을 배웠나요?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아기와 단 둘이 있었다.
낮에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봤다. 
낮에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여성은 언제나 수술을 받는다. 나는 그 여자들과 나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던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전에는 꼭 잠을 오래 자야 했다. 이제는 딸이 세시간마다 한 번씩 나를 깨운다. 
전에는 대화를 좋아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린 아기와 단 둘이 집에 머무른다. 
외출은 언제나 아이와 남편과 함께였다(이들 없이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리라 믿었다. 멍했고,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무언가 심오한 것.
나는 말하지 못하는 게 어떤 건지를 배웠다. - P78

딸을 낳고 어린아이가 될 때까지 키운 일은 무언가에 대해 알아가는 매우 고된 과정이자 우리 둘 모두에게 부과된 일종의 신체적 고난이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생존에 관한 지식, 그러니까 먹고 자는 것 같은 극도로 단순한 일과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에 관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내 주위에는 온통 전형적인 엄마, 이탈리아의 성모마리아, 이 여성들의 젖가슴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미소만큼이나 때묻지 않은 붉은 벨벳 천, 들판을 슬로모션의로 뛰어가서 천사 같은 아이들을 어루만지려고 달려드는 젊고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여자, 깨끗한 담요에 싸인 깨끗한 아기들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고 있는 참을 수 없이 보드라운 모델들만이 떠다녔다. 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경험은 눈멀고 입다문 채 말해지지 못한 뭔가로 남았다. - P78

나에게는 엄마됨에 관한 페미니스트 이론이랄 게 없다. 그저 이 기록과, 이 단락과, 얼마간의 통찰이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이 글은 엄마됨에 대한 또 다른 여성의 글과 형태가 같다. 그 글은바로 어린 아이가 둘 있는, 알타Alta라는 여성의 책 《모마(Momma>다. 또한 이 글은 르네 클레르René Clair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 당시 썼던 일기, <히프노스의 잎사귀Leaves of Hypnos>와도 형태가 같다. 
우리는 어느 정도 레지스탕스다. 해야 할 일이 끊이질 않아서 생각을 분석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줄줄이 적어둔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 P79

사람들이 가난, 또는 질병, 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상태. 또는, 어머니와 아이들이 언제나 보호받는 건 아니라는 것. 
여성과 아이들에게 지붕과 입을 옷, 음식을 제공받을 자격은 타고난 권리가 아니다. 여성이 필수품을 얻으려면 아이들의아버지와 결혼해야만 하고, 아이 아버지에게 이들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후레자식‘이라고 불리고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간다.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는 것에 관해 말할 때, 어떤 여성과 아이들이 보호되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 P80

그리고 사회가 개입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할 때 사회의 도움을받는 여성은 반드시 비천해야만 한다. 복지 제도의 모든 측면이 작정한 것처럼 인간의 존엄을 빼앗아간다. 가난한 여성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내 정신은 그 모욕 이후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남편이 나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후 내 마음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던 것처럼. 거의 굶어죽을 뻔했던 이후 내 몸이 전혀 회복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해 겨울부터 나는 시들어가기 시작했고, 해가
지날수록 전보다 더 지치고 소모되어 갔다."
ㅡ앨리스 워커, <한나 캐후프의 복수> - P80

가난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그린 문학작품에서는 이들의 정신과 신체가 파괴되는 모습이 되풀이된다.

"돈, 그녀는 생각 중이다. 질병. 거리. 오물, 아이들, 내 아이들. 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아가들, 내 아이들. 바깥에는 답이 없다. 
오직 땅 냄새, 비가 올 것 같은 기운, 모든것에 내려앉아 있는 신비한 푸른 빛, 하늘을 뒤로 하고 사지가 마비된것처럼 가지를 흔들어대는 나무들, 화물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귀에 거슬리는, 껄끄러운, 깨지는 것 같은 소리. 내 아이들, 그 아이들.
너무 힘든 일이다. 다시 가난한 엄마로 살아가는 건."
ㅡ틸리 올슨, 《요논디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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