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기억의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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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다녀온 후부터 나는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청춘의 한 시절을 자꾸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무려 삼십 년도 넘은 거의 사십 년이 되어가는 머나먼 과거의 일들이다. 반복해서 돌이키다보니 처음에는 안개에 덮인 듯 아득했던 기억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듯했고 점점이 끊겼던 사건의 순서가 느슨하게 연결되기도 했다. 잘못 기억했던 부분이 바로잡히거나 까맣게 잊고 있던 에피소드가 불쑥 떠오르는 일도 있었다. - P203

뜻밖에도 숲속 식당은 운치 있는 오두막 이런 게 아니라 둥근유리 천장에 사방이 개폐 가능한 유리문으로 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식당 앞에서 제부가 내게 좋지요 뭐 어쩌고 했다. 청력이 좋지않은데다 마스크 때문에 뒷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나는 좋네요, 했다. 식당의 평평한 마당 끝에 도로가 있고, 도로 너머로 논과 밭이 펼쳐졌고, 그 뒤로 노랗고 빨갛게 단풍이 든 낮은 언덕과높은 산들의 능선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식당은 알록달록한 그릇 한가운데 놓인 유리구슬처럼 사방으로 단풍 든 산에 둘러싸인 야트막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볼수록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곳 같았다. 그게 언제인지, 얼마나 오래전이었는지는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전에 꾼 꿈속의 장소가 아닐까 싶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 P207

대학원생 시절, 고작 스물네 살일 뿐인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세상을 다 산 듯한 꼴로 살았다. 어느 순간 결심만 하면 삶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굳이 서둘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조만간 세계에 어떤 파국이 와서 내 삶을 끝내주리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가깝게 느꼈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일은 마치 몸이 뒤집힌 채 거꾸로 치달려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다보면 결국 최악의 과녁에 정통으로 박히리라는느낌, 그러면 끝장이라는 시원하고 원통한 예감만 들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내게 왜 그런 꼴로 사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209

어느 날 경서가 내게 너 좋아하는 국수를 먹으러 가자며 캠퍼스안에서 가장 먼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식당에 데려가려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교내에 그런 식당이 있는 줄도 몰랐다. 경서도 얼마 전에 지도교수를 따라갔다 처음 알게 된 식당이라고 했다. 원래는 교수들 차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던 허름한 휴게소 같은 곳이었는데 국수를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이제는 교수들이 가는 어엿한 식당으로 탈바꿈했다고 했다. 경서는 내가 전날 발톱을 너무 짧게 깎았더니 신발이 닿을 때마다 거슬려서 아프다고 말한 건 까맣게 잊고 오직 내게 맛있는 국수를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교정 위쪽으로 하염없이 올라가더니 하늘까지 닿을 기세로 뻗쳐 있는 계단 앞에서 저기만 올라가면 식당이라고 했다. - P217

그때 모든 인내심이 바닥난 내가, 국수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이계단을 어떻게 올라가냐고, 내가 지금 발톱이 빠질 것 같다고, 아까 내가 발톱 얘기할 때 뭘 들은 거냐고 울먹이며 분개했을 때 경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던 게 기억난다.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문제 제기가 깊고 정확한 공감을 얻었을 때처럼 어린애같이 입을크게 벌리고 말이다. 어리둥절한 내가 왜, 왜 웃느냐고 물었더니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너는 참 이상하게 웃긴다고 갑자기 네 속에서 이상한 게 발사되는 것 같다고 했다. - P218

내 속엔 그를 해석할 능력도 의지도 욕망도 없었다. 내 속엔 경서를 향한 아무것도 없었다. 경서가 아닌 다른 누구를 향한 것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내 내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폐허였고 욕망이 소진된 폐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그러니까 그런 거고, 그런 식이니까 그런 식이라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건 좀 이상한데, 뭔가 문제가 있는데, 라고 느끼면서도 꺼떡꺼떡 경서가 만나자면 만났고 그에게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나 만난 사람들 얘기를 있는 대로 털어놓곤 했다. 내가 굳이 뭔가를 결정하지 않아도 어차피 어떤 파국이 와서 끝내줄 테니까 뭐, 그런 식이었다. - P219

자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때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경서와 내가 멀어지게 된 데 특별한이유나 계기는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당시 내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고 대학원이라는 접점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 P230

어느 날 경서가 내게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우편으로 뭔가 보내줄 게 있다고 했다. 뭐냐고 물어도 말해주지 않았다. 며칠 뒤 집으로 덕지덕지 테이핑된 큰 박스가 도착했는데 고급스러운 선물이 아니라는 것은 낡은 박스의 꼬락서니만 봐도 충분했다. 박스를 뜯자 크기도 모양도 다른, 오래되어 나달나달한 것부터 가죽 장정의 새것까지 각종 노트들이 들어 있었다. 경서는 동봉한 편지에서 자신이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십년동안 써온 일기들을 하나도빼놓지 않고 보낸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런 모험은 평생 해본 적이 없다고, 마치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심정인데 그 미사일이 돌아와 터질 장소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썼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 편지를 쓰던 경서의 떨림을 감지할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저 기가 찰 따름이었고 나야말로 무슨 폭탄을 전달받은 기분이었다. 나보고 이걸 어쩌라는 거지?
설마 다 읽으라는 거야? - P233

다 읽었으면 돌려달라는 말, 그 말을 할 때의 경서의 굳은 얼굴과 쭈뼛한 말투 속에서 이제야 나는 깊은 고통과 두려움을 읽어낸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어어,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그거 아직 다안 읽었는데,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거였느냐고 물었다. 그때 경서가 할말을 잃은 듯 나를 망연히 바라보던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뼈가 저릴 듯 부끄럽다. 

당시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물, 과장된 연기만 하도록 태엽 감긴 무였다. 잠시 뒤 그가 다 안 읽었다면, 아니 다 안 읽었어도 이제 그만 돌려달라고, 그리고 잠깐 한숨을 쉰 뒤, 내 일기를 왜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 그래, 그렇지, 돌려줘야 하는 거였구나, 웅얼거리다 놀라 입을 다물었다. 경서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떨리지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그럼 너는 내가 일기를, 내가 십년 동안 쓴 일기를 너한테 버린 걸로 알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곧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 P235

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던 건 맞다. 경서에 대한 연애 감정이나 욕망이 없었던 건 어쩔 수없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봐. 내가 집요하게 수박을 원할 때 경서는 수박을 사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박을 사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눈길을 그렇게 한사코 피했던 건 어쩌면 잘못 엮인 노끈처럼 나와 엮이는 것이 그도 무섭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 P236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 - P241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꼬박 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숲속 식당의 마당에 홀로 서있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을 권하듯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 테고 우리는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돌아갈 것이다.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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