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의 입이 움직였지만,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말했다. 

"저를 위로할 생각은 마세요.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에요. 남의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지저분한 접시를 남기면 부끄럽듯이, 숨길 수 없는 것이라면 부끄러운 것이죠. 어쩔 수 없이 부끄러운 겁니다. 취업자건 실업자건, 정직한 사람이건 인색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냄새가 납니다. 그래요, 냄새가 나요. 창이 없는 방에서 냄새가 나듯이, 자주 갈아입지 않은옷에서 냄새가 나듯이 냄새가 나요.  - P312

썩은 물의 악취처럼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게 되죠. 씻어낼 수도 없어요 새 모자를 써도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구토 후에 입을 헹궈내도 냄새가 나는 것처럼 가난의 냄새는 몸에 배어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맡을 수 있죠. 아가씨의 언니는 그 냄새를 금세 맡은 거예요. 여자들이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깔보는 시선을 저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도 어쩔 줄 모르지만, 본인이 가장 당황스럽죠. 벗어날 수도 없고 피해 갈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술이나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남자가 와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말을 계속했다. - P313

"여기 이 나라 사회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가난한사람들은 왜 점점 더 술에 의존하는 걸까요? 심각한 문제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두고 귀족 부인들이나 자선단체 후원자들은 차를 마시면서 고민하죠. 잠깐 고민하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저처럼 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럽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저 역시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그냥 말씀하세요. 점잖게 말씀하실 필요도 없고 저를 동정하지도 마세요!" - P313

남자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몸을 점점 깊숙이 웅크렸다.

"미안합니다." 
마침내 남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전했다. 
"제가 어처구니없이 아가씨를 비난했군요. 시도 때도 없이 미련하게 화를 내고,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무나 걸리기만하면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듯이 퍼붓게 되는군요. 그리고 저 혼자만 전쟁하러 갔던 것처럼 착각하죠. 수백만이나 되는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데. 저는 매일 아침 일터로 가면서, 집을 나서는 사람들을 관찰하곤 합니다. 잠에서 덜 깨어 얼굴은 지치고 창백하죠. 원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터로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면 다시 전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표정이나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겁죠. 아무 이유 없이, 혹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모두 지쳐 있어요.
그 끔찍하고 무의미한 삶을 의식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런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죠. 저처럼 심각하게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 P315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밖에는 해본 게 없어요. 이제 더는 견딜 수 없어요. 내 인생이 밑바닥으로, 주변으로 밀려난인생이라는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도록 일하는 사이에 찢어진 구두 아래서 시간은 쉴새 없이 달아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저는 제게 일을 시키는 건축사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만큼 아는 것도 많아요. 그들과 똑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똑같은 피가 제 혈관을 흐르고 있죠. 단지, 저는 너무 늦게 돌아왔습니다. 기차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 기차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죠.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기술도 배웠고, 지능이 모자라지도 않습니다. 김나지움과 수도원 부속학교에 다닐 때에는 우등생이었어요. 음악 실력도 괜찮았고, 오베르뉴에서 온 신부님에게서 프랑스어도 배웠죠. 피아노가 없으니 연습할 수도 없고, 프랑스어로 대화할 사람이 주변에 없으니 거의 다 잊었죠. - P316

"말 좀 해봐!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뭘 하면서 살 지야?"
"뭘 할 거냐고?" 남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간신히 웃음을 보였다.
"글쎄,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수입이 없으니 은행 계좌에 의지해야지 뭐. 그런데 계좌에 돈이 한 푼도 없으니 6주 후에나 들어올 실업급여에 기대야겠지. 우리 복 받은 도나우 공화국의 30만 실업자들처럼 복지 기관에 가서 그 영광스러운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만약 그나마도 못 받으면 그냥 굶어 죽어야지 뭐."
남자가 자신의 절망을 냉소적으로 드러내자 여자는화가 났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그만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당신 정도면..……… 일자리는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남자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지팡이를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아니야! 다른 일자리는 찾지 않을 거야! 지쳤어!  - P368

‘일자리‘라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지난 11년 동안 용케도 여기저기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때마다 간신히 연명만 했을 뿐,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 일자리는 항상 있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지.
나는 4년 동안이나 ‘전쟁‘이라는 살인 공장에서 일했어.
그 후에는 이런저런 공장과 회사를 전전했지. 나는 항상다른 사람들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어. 돈 많은 사업가, 자본가, 소유주 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데 내 인생을 허비했어.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 나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어. ‘자, 이제 그만 나가! 너는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이제 다른 데로 가봐!‘ 그러면 나는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어. 이제 정말 더는못 하겠어. 지쳤어, 더는 안 할 거야!" - P369

크리스티네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남자가 여자의말을 가로막았다.
"크리스티네, 또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짓은 못 하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그동안 나는 일자리를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거절이 예정된 전화를 걸고,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고, 아침이면 청소부가쓰레기로 가져가는 이력서와 구직 신청서를 수도 없이썼어. 이제 더는 못 하겠어.
- P369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가 너무도 불쌍하고가려했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연민을 남자가 눈치채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미래가 두렵지 않아. 신세 한탄이나 하려고 너를 찾아온 게 아니야. 동정을 바라지도 않아. 그런 것은 도움이 될만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작별 인사 하러 왔어. 우리가 계속 만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같아. 너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그래도 내게 아직 자존심은 살아 있으니까. 깨끗하게 헤어져서 서로 부담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어."
"페르디난트!" 여자가 남자의 팔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남자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여자는 속수무책으로 밀려오는 두려움 속에서 남자의 이름밖에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 P371

남자가 뒷주머니를 더듬어 군용 연발권총을 꺼냈다.
11월 오후의 햇빛이 총신에 반사되었다. 여자는 그 무기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당신 관자놀이에・・・・・…." 남자가 말했다. "무서워할 것없어. 내 손은 떨리지 않을 거야. 그러고 나서 나는 심장을 겨눌 거야. 이것은 대구경 연발권총이야. 아주 확실한 무기야. 마을 사람들이 두 발의 총성을 듣기도 전에모든 것이 끝날 거야. 두려워할 것 없어."
여자가 아무 말 없이 냉정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침착하게 권총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둘이 앉아 있는 벤치 앞에 높고 거대한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가상이 서 있었다. - P375

"여기서는 싫어." 여자가 다급히 중얼거렸다. "여기는싫어. 그리고 지금 그러기도 싫어.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쳐다보면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전에 다시 한번 같이 있고 싶어. 정말로 같이…………. 아무 두려움 없이, 밤새도록 당신과 나눌 이야기가 많을거야. 다시는 하지 못할 마지막 이야기들. 그런 다음에하자. 당신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 아침이 되면사람들은 우리 둘을 발견하게 되겠지."
"그래, 좋아." 남자가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생애 최고의 시간을 함께 가져보자. 미안해.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미풍이 두 사람을 간질이듯 스쳐 지나갔다. 햇빛이 감미롭게 피부에 와닿았다. 둘이 함께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신기하게도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행복하기만 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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