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리나는 늦은 시간에 혼자서 돌아왔다. 무엇을 디디는지모를 만큼 흔들리는 동생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앤 엘리자는위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언니는 애정을 동생의 운명에 너무 강렬하게 투사했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면 마치 자기의 삶과 동생의 삶, 두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행복을 갈망하는 동생을 보자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은 침묵으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의 기분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법이 없는 에블리나는 언니가 이미 자기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고통이 덜했더라면 앤 엘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동생도 그렇게 무심한 척하며 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준비했다. - P75
그 뒤로 앤 엘리자는 자기 생각을 동생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에블리나도 언니의 충고나 동정을 원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계획하면서 벌써 언니의 존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앤 엘리자는 잔인한 운명을 맹신하다시피 했기에 그녀 자신이 이렇게 배제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생살이 찢어지듯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에블리나에 대한 사랑에서 모성애 같은 열정을 없애버릴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매로서 느끼는 애정의 온도를 낮출 수는 없었다. - P78
그때 앤 엘리자는 고통스럽게 수련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에블리나가 떠나고 나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고독을, 온갖 실험을 하며 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외로움에 단련되리라 믿었다. 그들은 그리 멀리 떨어져 지내지 않고, 동생은 날마다 시계 수리공의 가게에서 자기에게 ‘뛰어올‘ 터였다. 동생 부부는 일요일마다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터였다. 그러나 앤 엘리자는 에블리나가 시간이 갈수록 그 일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대충하리라는 게 벌써 짐작이 갔다. 특히 에블리나에 대한 소식을 알고 싶어 해 질 녘에 가게 문을 닫고 홀로 래미 씨 가게 앞에서 서성거릴 게 뻔해 보였다. 하지만 그럴가능성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원하면 나한테 찾아오겠지. 내가 여기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 P79
앤 엘리자는 래미 씨가 그의 약혼녀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가 버리면 징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 에블리나가 그와 대화하면서 짜증나는 게 있었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앤 엘리자는 한눈에 알아챘다. - P82
두 자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벗었다.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고 불을 끄자 어둠 속에서 에블리나가 흐느껴 우는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앤 엘리자는 들썩거리는 동생을 건드리지 않고 자기 쪽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동생이 그처럼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밤은 더디게 흘러갔다. 그들의 삶에 그렇게도 큰 부분을 차지했던 시계가 지루하고 고집스럽게 똑딱거렸다. 에블리나의 흐느낌에 침대가 계속 들썩이다가 서서히 뜸해졌다. 앤 엘리자는 동생이 결국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어 자매는 눈이 마주쳤고, 에블리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앤 엘리자는 그만 용기를 잃었다. 그녀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애원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울지 마, 동생아. 제발 울지 마." "견딜 수가 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동생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앤 엘리자는 들썩이는 동생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제발, 제발 울지 마." 그녀가 반복해서 말했다. "나머지 1백 달러를 마저줄게.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처음부터 네게 주려고 생각했었어. 다만 네 결혼식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 P85
다음 날 아침, 래미 씨와 그의 아내는 세인트루이스로 향하고 앤 엘리자만 가게에 홀로 남았다. 미스 멜린스와 호킨스 부인과 조니가 뒷방의 장식을 떼고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들렀을때, 겉으로는 첫 이별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앤 엘리자는 그들의 친절을 당연히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위로‘라 믿고 건네는 말들은 그녀에게 빈껍데기와 같았다. 그녀는 익숙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 바로 저편에 ‘고독‘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봤다.
앤 엘리자는 그 엄청난 손님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 없었다. 그 손님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집 안에 새로 들어온 동반자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없었다. - P88
에블리나가 떠난 다음 날, 가게와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냉담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상황이 달라지자 가게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가게 문을 처음 열고 들어선 손님을 보고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또 밤이면 침대의 자기 자리에 누워 밤새 뒤척였고, 때때로 한 번씩 졸다가 문득 깨어나 비몽사몽간에 에블리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침묵이 그녀 주위를 둘러싸자 벽과 가구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혼 녘과 자정에들리는 낯선 한숨 소리와 은밀한 속삭임에 기겁하곤 했다. 유령이 손으로 창문 셔터나 바깥쪽 걸쇠를 흔들었다. 한번은 에블리나가 어두운 가게 안을 살금살금 걷는 것 같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다가 문지방쯤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국에는 그것이 침대 틀이 뒤틀리는 소리였다든가, 미스 멜린스가 위층에서 쿵쿵대며 걷는 소리였다든가, 맥주를 잔뜩 실은 수레가 우렁차게 지나가며 문 걸쇠를 흔드는 소리였다는 등 소음이 난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긴 시간 동안 정처 없이 떠돌던 공포심이 온갖 불길한 억측으로 단단히 굳었었다. - P89
그녀는 언제나 되도록 늦게 가스등을 켰는데, 혹시라도 누군가 오면 재빠르게 가스화구에 불을 붙일 수 있게 성냥갑을 팔꿈치에 놓아 뒀다. 점점 짙어지는 어스름 속에서 드디어 가게 밖 계단을 내려오는 호리호리하고 짙은 그림자가 보였다.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가스등에 불을 붙이려고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꼭 이름을 물어봐야지‘ 하고 그녀는생각했다.
그리고 가스등을 높이 치켜들자 문간에는 동생이 서있었다. - P115
마침내 그녀가 가련하고 창백한 망령 같은 에블리나가 온 것이다. 여윈 얼굴은 옅은 분홍빛이 바래고 머리카락은 뻣뻣한 물결 모양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앤 엘리자의 것보다도 더 초라해 보이는 망토가 그녀의 좁은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환한 가스등 불빛이 앤 엘리자를 마주보고 선 동생을 비췄다. - P116
"동생아...… 아, 에블리나! 네가 올 줄 알았어!" 앤 엘리자는 기쁨의 탄식을 쏟아내며 동생을 와락 붙잡았다. 에블리나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입에서 마구 쏟아 냈다. 호킨스 부인이 아기에게 중얼중얼 길게 내뱉는 것 같은, 별 의미도 없고 발음도 분명치 않은 애정이 어린 말이었다. 에블리나는 잠시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러더니 언니에게서떨어져 나와 가게를 쭉 둘러봤다. "나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아. 난롯불 없어?" 그녀가 물었다. "없기는 왜 없겠어!" 앤 엘리자는 동생의 손을 꽉 붙들고 뒷방으로 끌고 갔다. 아직은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텅빈 방이 그녀에게 온기이자 빛인 동생의 존재로 다시 한 번 가득 채워지는 것을 그저 느껴 보고 싶을 뿐이었다. - P116
앤 엘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문제였어. 그때 이미 마약을 했던 거야. 하지만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끔찍했어. 우리가 그곳에 간지 한 달쯤 됐을 때 그 사람이 일주일간 사라졌어. 상점에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그이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줬었거든. 하지만두 번째엔 해고했고, 그런 다음 다른 일을 구하기까지 한참 동안 실직 상태였어. 우린 있는 돈 다 써 버렸고, 더 싼 곳으로 집을 옮겨야만 했어. 그러다가 그 사람이 일자리를 구했지만 임금은 거의 받지 못했고, 거기서도 오래 일하지 않았어. 그러다가 그사람이 아기에 대해 알고 나서…………." "아기라니?" 앤 엘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죽었어. 단 하루밖에 살지 못했거든. 어쨌든 그 사람이 임신에 대해 알고서는 의사에게 줄 돈이 없다고 화를 내면서 언니한테 당장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 그 사람은 언니가 나 모르게 돈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에블리나는 고개를 돌려 후회 가득한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그 사람이 나보고 언니한테 나머지 1백 달러를 얻어 내라고 했던 거야." - P123
신부가 천으로 덮은 무언가를 두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오자 앤 엘리자는 슬며시 가게로 나오며 뒷방의 문을 닫아 방에 에블리나와 신부 단둘이 있게 했다.
그날은 5월의 따뜻한 오후였다. 맞은편 보도의 갈라진 틈바구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구부러진 가죽나무는 신록을 분수처럼 뿜어 대고 있었다. 얇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봄날에 걸맞게 나른한 걸음걸이로 지나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팬지와 제라늄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미는 남자가 쇼윈도 밖에 서서 앤 엘리자에게 꽃을 사라고 신호를 보냈다. - P139
앤 엘리자의 반감을 알아챘는지 그 후로 신부는 가게를 오갈 때마다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걸음을 멈춰 서서 그녀를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동생분은 마음에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가 여자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분은 영적 위안을 충만하게 받았어요." 앤 엘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부는 가볍게 목례하더니 가게를 나갔다. - P139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에블리나는 다시는 말을 하거나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오기 전 그 고요한 시간, 앤 엘리자는 이불 밖에서 쉬지 않고 떨리던 에블리나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봤다. 그녀는 동생 몸 위로 허리를 굽혀 동생의 입에서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장례식은 사흘 뒤에 치러졌다. 에블리나는 ‘갈보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신부가 필요한 절차를 모두 맡아서 진행하는 동안, 앤 엘리자는 방관자처럼 자신의 과거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부정되는 모습을 차갑고 무심한 태도로 바라봤다. - P140
한 주가 지나 그녀는 보닛 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그 작은 가게의 현관문에 섰다. 가게 안의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 계산대와 선반은 텅 비었고, 조화며 편지지, 와이어로 만든 모자틀, 염색 집에서 가져온 축 늘어진 옷 등 갖가지 친숙한 잡화들로 가득했던 창가도 말끔히 치워졌다. 그리고 문에 있는 판유리에는 "가게임대"라고 쓰인 표지가 붙어 있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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