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8번째 단편 <레귤러>
《종이 동물원》에는 총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레귤러>는 8번이다. 환상소설과 SF를 넘나든다. 장르소설을 읽는 듯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멋지다.
고급콜걸을 노리는 범인을 쫓는 루스의 활약도 멋지다. 인질이 된 딸을 죽게 만들었단 죄책감에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일을 하고 있는 루스. 그러나 예전의 나약한 엄마이자 여자는 이제 아니다. 새로 태어나고자 한다.
레귤레이터라는 장치는 루스의 척추 맨 위에 삽입되어 있는데 언제라도 냉철한 판단을 내릴수 있도록 하는, 즉, 사용자의 명령에 따라 기본 감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원하는 신체 부위 어디라도 이식하거나 합성하여 상상할 수 없는 강한 몸으로 대체할 수 있다. 생물학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걸까?

슬픔은 묵직한 역기처럼루스를 찍어누른다. 샤워부스 바닥에 주저앉아서, 루스는 몸을 잔뜩 옹송그린다. 이내 몸이 들썩거리지만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 덕분에 눈물이 흐르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루스는 레귤레이터를 켜고 싶은 충동에 맞서 싸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몸에게 쉴 시간을 줘야 한다. - P281
레귤레이터, 즉 루스의 척추 맨위에 삽입된 칩과 전자회로의 집적체는, 대뇌의 가장자리 계통 및 주요 대뇌동맥과 연결되어 있다. 기계 공학과 전자공학의 용어에서 빌려온 이름에 걸맞게 레귤레이터는 대뇌 및 혈관 속에서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같은 화학 물질의 농도를 유지한다. 그러한 물질이 너무 많으면 걸러서 배출하고, 부족하면 분비시킨다. - P281
그리고 레귤레이터는 사용자의 명령을 따른다. 이 장치를 몸에 심은 사람은 기본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공포, 경멸, 쾌락, 흥분, 애정 같은 감정을 법 집행기관의 실무자는 반드시 심어야 한다. 이는 생사가 걸린 결정에서 감정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자, 선입견과 불합리를 제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발포를 허가한다." 통신용 이어폰 속의 목소리가 말한다. 루스의 남편이자 강력계 책임자인 스콧의 목소리이다. 스콧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하다. 그의 레귤레이터는 켜져 있다. - P282
캐리는 루스의 총을 보고 악을 쓴다. "난 죽기 싫어요! 안 돼요, 제발!" "일단 여길 벗어나면 이 여자는 풀어줄 거야." 남자가 말한다. 캐리의 머리 뒤에 자기 머리를 감춘 채로. 루스의 양손은 권총을 쥔 채로 덜덜 떨린다. 배 속이 파도치듯 올렁거리고 귓속에서는 맥박 소리가 쿵쿵 울리는 와중에도, 루스는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경찰은 이미 출동했으니 아마 5분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남자는 달아날 시간을 더 벌려고 캐리를 곧바로 놔주지 않을까? 남자가 두 걸음 더 물러선다. 캐리는 이제 발버둥치거나 뻗대는 대신 미끄러운 바닥을 스타킹 신은 발로 조심조심 디딜 뿐이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따르려고. 그러면서도 터져 나오는 울음은 참지못한다. - P304
루스는 가능성을 냉정하게 검토하고 싶지만, 그리하여 결정을 내리고 싶지만, 후회와 슬픔과 분노가, 참을 만한 수준으로 레귤레이터가 감추고 억눌렀던 그 감정들이, 이제 더욱 날카롭게 솟구친다. 잊기 위해 쏟았던 노력만큼이나 생생하게 온 우주가 총구 위쪽 가늠자의 조그마한 점으로 쪼그라들어 흔들린다. 젊은 여성이, 살인범이, 시간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조금씩 사라져 간다. 루스에게는 부탁할 곳도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다. 오로지 자신뿐, 성난, 겁에 질린, 부들부들 떠는 자신뿐이다. 루스는 발가벗겨진 채 혼자이다. 루스 자신은 항상 알고 있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남자는 문에 거의 도착했다. 캐리의 절규는 이제 알아듣기 힘든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 P305
루스가 쏜 첫 번째 총알은 캐리의 허벅지를 파고든다. 총알은 살갗과 근육과 지방을 관통하여 뒤에 있는 남자의 무릎을 박살 낸다. 남자는 비명과 함께 수술칼을 놓친다. 캐리는 쓰러지고, 총에 맞은 다리에서 피가 솟구친다. 루스가 쏜 두 번째 총알은 남자의 가슴에 명중한다.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진다. - P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