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수도 빈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 크렘스 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잘것없는 마을 클라인-라이플링의 우체국. 이곳의 교체할 수 있는 정부 ‘비품‘은 여성이다. 당국에서는 그냥 ‘우체국 여직원‘이라고 부른다. 이 우체국이 인구가 적은 시골에 있기 때문이다. 수수하지만 호감이 가는 한 젊은 여성의 옆 얼굴을 유리칸막이를 통해 볼 수 있다. 다소 얇은 입술에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피곤한 탓인지 눈 밑이 검다.
저녁 무렵 여자가 사무실 전깃불 스위치를 켜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도 여자의 이마와 눈가의 주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젊은 나이의 이 여자는 창가에 놓인 접시꽃과 오늘 재미 삼아 철제 세면대 위에 놓아둔 양딱총나무 어린 가지와 함께 클라인-라이플링우체국에서는 가장 신선한 비품이다. - P16
그녀는 적어도 15년 정도는 이 우체국에서 더 근무할 수 있을 것이다. 핏기 없는 손가락으로 덜커덕거리는 창구 유리 칸막이를 수천 번은 더 올렸다 내렸다 할 것이고, 수십만 아니 수백만 통의 편지를 똑같은 동작으로 소인 찍는 탁자로 던지고, 검은색 황동 소인기로 툭툭 소리를 내며 수십만 아니 수백만 장의 우표에 소인을 찍을 것이다. 일에익숙해지면서 손놀림이 점점 더 빨라져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업하게 될 것이다. 수십만 통의 편지는 매번 다른 내용의 편지겠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똑같은 편지일 것이다. 우표 역시 각각 다른 우표지만, 그녀에겐 똑같은 우표일 뿐이다. 하루하루가 매일 다르지만 아침 8시부터 정오까지, 오후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반복되는 일과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을 것이다. 언제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 P17
조용한 여름날의 오전, 잿빛이 감도는 금발의 우체국 여직원은 창구 유리칸막이 뒤에 앉아 그런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아니면 단지 나른한 공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의자에 앉은 여자는 마주 잡은 창백하고 가느다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푸른 하늘에 숨 막힐 듯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7월,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에서 여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오전 업무는 이미 끝났다. - P17
이제 좀 선선해진 우체국 안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창문 사이 벽에 걸린 나무틀 벽시계뿐이다. 초마다 한방울씩 떨어지는 시간을 삼키고있는 듯 재깍재깍 가고 있다. 시계 소리는 희미하고 단조롭다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달래는 듯한 소리….….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자니 우체국 여직원은 스르르졸음이 밀려오면서 온몸이 나른하고 무기력해진다. 자수를 좀 해보려고 바늘과 가위를 사무실에 가져다 두었지만, 꺼내고 싶은 마음도 그럴 힘도 없다. 숨소리가 낮아지고 눈이 감기면서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댄다. 나른하고도 아늑한 기운이 몰려온다. - P18
그때 갑자기 탁!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움찔한다.그리고 다시 한번 더 강한 금속성 소리가 긴박하게 들려온다. 탁, 탁, 탁, 전신기에서 활자쇠가 격렬하게 전보용지를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르륵드르륵 기계음이이어진다.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에 전보가 오는 일은 드물다. 신경 써서 받아야 한다. 졸고 있던 우체국 여직원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재빨리 원형 테이블로 다가가, 기계에 종이 릴 테이프를 끼워 넣는다.
그런데 종이테이프에 찍혀 나온 첫 단어를 보자마자 여자는 머리카락의 뿌리까지 화끈 달아오름을 느낀다. 난생 처음 전보에 자신이 이름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문이 모두 나오자, 여자는 전보를 읽고 또 읽는다. 그러나 전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 P19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클라인-라이플링, 오스트리아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든지 날을 정해 와라. 오기 전에 미리 도착 시간을 알려다오. 클레르-안토니
여자는 골똘히 생각한다. ‘나를 기다린다고? 안토니가 누구야? 누가 못된 장난을 하고 있나?‘ - P19
그 순간, 이번 여름에 이모가 유럽에 올 거라고 몇 주전 어머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래, 맞아, 이모 이름이 클레르였지. 그리고 안토니는 어머니가 항상 안톤이라고 부르는 이모부일 거야‘ 그제야 여자는 며칠 전 프랑스의 셸부르에서 어머니에게 온 편지를 직접 전해준 일이 생각났다. 편지에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있는 듯 어머니는 편지 내용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 전보는 크리스티네 앞으로 왔다. ‘이모를 만나러 폰트레지나로 가야 한다는 뜻인가? 어머니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는데.‘
여자는 이곳 우체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온 전보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꼼꼼히 들여다본다.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다. - P20
‘정오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지금 곧바로 어머니에게가서 무슨 내용인지 물어봐야겠어.‘ 여자는 열쇠를 집어 들고 사무실 문을 잠근 다음 집으로 뛰어간다. 흥분한 여자는 전신기의 손잡이를 잠그는 것도 잊었다. 텅 빈 사무실에서 전신기의 황동 활자쇠가 화라도 난 듯이 덜커덕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전보용지를 때리고 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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