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소한 작가, 생소한 작품이지만 처음 접하는 벨기에 작가의 짧은 소설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번만에 읽지는 못하겠는 것이 스토리도 그렇고 작품의 분위기나 작품에 수록되어 있는 브뤼주의 사진들도 온통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하고 우울한 느낌이어서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브뤼주는 실제 벨기에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작가가 실제로 그곳에서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고향이었고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의 작품의 배경으로, 그리고 35장의 사진으로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사진이 들어간 책들이 흔하지만 19세기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하는데, 프랑스에서 뱔표된 이 작품에 사진이 수록됨으로써 <죽음의 도시 브뤼주>는 최초의 사진 삽화가 수록된 소설이 되었다. 사진에 담긴 브뤼주의 거리, 성당, 종탑, 수녀원, 운하 위의 다리, 배를 찍은 흑백 사진들이 우울한 분위기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데 , 더욱이 그 사진들에 인간 피사체의 모습이 어떤 사진에서도 없다는 것이 더 우울함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거리를 찍은 사진조차도....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죽음의 도시 브뤼주로 이주한 주인공 위그는 매일 아내를 그리워하고 아내와 행복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브뤼주의 거리를 헤매고 방황한다. 어느 곳 하나 마음 붙일 곳 없는 위그의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이 절절이 느껴진다. 도시의 어디를 가보아도 살고 싶은 생각보다 아내를 따라 죽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죽어서 아내를 만나겠단 간절함과 종교의 힘으로 그러한 욕구를 억누른다. 하지만 회색빛 죽음의 도시 브뤼주가 주는 공허함과 쓸쓸함에 이미 감염이 되어버린 삶이란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거리를 방황하던 중 아내와 얼굴도 모습도, 금발의 머리도 똑같이 생긴 '제인'이라는 여자를 운명과 같이 만나게 된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제인이라는 여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것이 파멸이라고 해도 아마 기꺼이 들어갔겠지. 하지만 그 제인이라는 여자는 아내가 지니고 있던 우아하고 정숙하며 차분한 분위기의 여자가 아니었다. 위그는 그런 제인에게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제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기대하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위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제인이 아내를 대신하고 있는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무서워져 버렸다. 지독한 외로움이 결국 그를 이런 비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극단의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던 제인과 사별한 남자의 추문은 은영중에 마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소문은 결국 위그 자신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지만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한편 방탕하고 천박하며 위그의 돈에 관심이 많은 제인은 위그의 저택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곳에서 돈이 될만한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며 거짓과 위선으로 위그를 유혹한다. 결국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불행을 향하여 한발, 한발 자기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아닐런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5월의 예배 행렬이 있는 날, 제인은 행렬이 위그의 집 앞을 지나간다는 것을 빌미로 결국 그의 집을 방문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아직 아내의 초상화와 아내가 입었던 드레스들, 아내가 앉았던 의자와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던 거울.... 그리고 아내가 죽기 전 잘랐던 길고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보석상자를 간직하고 있는 그곳......!
그곳에서 결국은 파국을 맞고 마는 것이다. 아내의 아름다운 금발에 목이 졸린 제인의 얼굴을 보며 아내를 두 번 죽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브뤼주의 회색빛 우울한 거리를 방황하며 늘 하던 생각은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은 정작 위그 자신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러한 결말을 향하여 달려온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미 작품의 제목에서 이를 암시하고 있었다!
아, 여전한 브뤼주의 회색빛 거리! 위그는 자신의 영혼이 이 회색빛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흩어져 있는 이 침묵에,오가는 사람 없는 이 공허함에 감염되고 있었다.(102)
이제 나날이 두 여인의 차이점이 더욱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오! 아니다, 죽은 아내는 그녀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벌인 정사를 합리화했던 변명거리를 없애버리고 그 속에서 비참함을 발견하고 나자 두 여인 사이에 드러나는 이와 같은 명확한 차이 때문에 상심했다. 수치심에 가까운 난처함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그토록 애도했던 아내에 대해, 이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 아내에 대해 더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127)
그렇다! 그는 그녀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한밤중의 종소리에, 이 북쪽 지역에서 구름이 끊이지 않고 이슬비로 흩어져버려 계속해서 내리는 가는 비에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녀를 지켜보며 고통을 느끼고 슬퍼할 정도로 질투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131)
얼이 빠진 듯한 위그는 제인을 향해 돌진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속으로 눈물을 흘린 듯 눈물에 젖어 연약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떠나지 마! 떠나지 마! 내가 미쳤었어..." (137)
그는 제인과 함께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십자형 유리창은 닫혀 있었다. 제인은 창문 하나를 열면서 앞으로 나갔다. "아, 안돼!" 위그가 말했다. "왜요?"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서 그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행렬이 지나갈 때는 더욱더 그러면 안되었다. 지방은 고상한 척하는 곳이다. 추문이 돌 것이다. (154)
위그의 짜증을 본 제인은 빈정거리고 사악하게 즐거워하며 그를 더 놀리고 싶은 마음에 몰래 다른 방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만지고, 장식품들을 뒤엎고, 옷가지들을 구겨댔다. 갑자기 그녀는 요란하게 웃으며 멈췄다. 그녀는 피아노 위에 있는 귀중한 보석상자를 발견했고, 계속해서 도발적인 행동을 이어서 하고자 뚜껑을 열고 꽤 놀라면서도 재밌다는 듯 긴 머리카락을 풀어 공중에서 흔들었다. (162)
그러자 위그는 미쳐버렸다. 그의 귀에 불꽃이 일었다. 눈에는 핏발이 섰다. 어지러움이 머릿속을 휩쓸고, 갑자기 광분하면서 손끝에 경련이 일어 무언가를 움켜쥐고, 비틀고, 꽃을 꺾고 싶은 욕망이 일었고, 손에는 악력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제인이 여전히 목에 두르고 있는 머리카락을 잡았고, 그것을 되찾고 싶었다! 그는 거칠고 사납게 그녀의 목을 팽팽하게 감싸고 있는 밧줄처럼 뻣뻣한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꽉 쥐었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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