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고요한 대저택의 복도에는 어둠이드리웠고, 크레이프 천으로 된 가림막 커튼이 내려졌다. 위그 비안은 늦은 오후가 되면 매일 그랬듯 외출할 채비를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위그는 2층에 있는 널따란 방에서 온종일을 보냈다. 방 창문으로는 로제르 강둑이 보였고, 강기슭을 따라 지어진 그의 저택이 물에 비치고 있었다. - P11
그에게 아내와의 이별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호화롭게 여가와 여행을 즐기며,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새로운 지역에서 사랑을 맛보았었다. 전형적인 부부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한 즐거움뿐만 아니라 순수한 열정, 지속되는 열기, 계속되는 성관계, 둑길이 서로 평행하게 위치하지만 물 위에서는 두 그림자가 뒤섞이는 것처럼 서로 먼 듯하면서도 결합하고 있는 영혼의 일치 같은 것 말이다. 이 행복했던 십년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그렇게나 빠르게 흘러버렸다! - P13
그렇게 서른을 갓 넘긴 아내는 죽어버렸다. 몸져누운지 몇 주도 안 되어 이내 쓰러져버린 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를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위그는 양초가 비추는 것처럼 생기 없고 창백한 그녀의 꽃처럼 아름다운얼굴빛, 크고 검은 눈동자를 지닌 진주 같은 눈, 그리고 눈동자와 대조를 이루는 호박색 머리카락, 길고 구불구불하게 늘어져 등을 모두 덮어버리는 그 머리카락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 P13
Ⅱ 위그는 이제 겨우 마흔 살이었지만, 불확실한 걸음걸이와 약간은 구부정한 자세로 둑길을 따라 같은 여정을 매일 저녁 되풀이했다. 혼자가 된 삶은 그에게 일찍 찾아온가을이었다. 관자놀이는 텅 비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잿빛가루로 가득했다. 생기 없는 그의 눈은 멀리 삶의 아득한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브뤼주 역시 어찌나 슬픈 도시인지! 위그는 그런 도시를 사랑했다! 그는 바로 그 슬픔 때문에 이 도시를 선택했고, 그런 큰일을 겪은 후 이곳에 와서 살게 된것이다. 한때 행복했던 시절, 아내와 함께 원하는 대로 여러 나라를 떠돌며 살아가고, 파리로, 외국으로, 바닷가로여행을 다니던 때에는 그녀와 이곳에 오더라도 도시의 엄청난 우울함이 그들의 기쁨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혼자가 되자 위그는 브뤼주를 회상했고 이제는 그 도시에 정착해야 한다는 직감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 P22
그는 진지하게 오랫동안 자살을 생각했었다. 아! 그 여인을 그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향해 있다! 그가 항상 쫓아다니던 그녀의 목소리는 지평선끝에, 너무나도 멀리 잠겨 있다!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난 뒤그가 그녀를 전적으로 따르게 하고 온 세상으로부터 그를분리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해의 열매처럼 입안에 영원히 재의 맛만을 남기는 사랑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 P26
그런데 갑자기, 그가 정신을 집중하여 기억 속에서 이미 반쯤 지워진 특성들을 재구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다가, 행인들을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런 일은너무나도 드물었던 위그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젊은 여인에게 돌연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처음에 그는 거리 반대편 끝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본 위그는 굳은 것처럼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 P28
반대 방향에서 오던 사람은 그를 스쳐 갔다. 그것은 충격이고, 예기치 않은 출현이었다. 위그는 잠시 어지러운 듯보였다. 그는 환영을 멀리하려고 눈에 손을 갖다 댔다. 위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걸어가며 멀어지는 미지의 여인을 향해 몸을 돌려 가던 방향을 바꾸고 그가 내려가던 둑길을 벗어나 느닷없이 그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여자를 따라잡기 위해 그는 빠르게 걸어가 인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가 넋이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면 무례하다고 느꼈을 정도로 집요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젊은 여자는 길을 걸어가며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냉담했다. 위그는 점점 더 이상한기분이 들고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가 이 길에서 저 길로돌아다니며 그녀를 쫓아간 지 벌써 몇 분이 흘렀다. 때때로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에게다가갔다가 너무 가까이 간 것 같으면 놀란 기색으로 멀리 물러났다. 위그는 어떤 얼굴을 알아내기 위해 찾아간우물을 발견한 듯 매혹당한 듯하면서도 겁에 질린 듯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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