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황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이없게 흘러간다. 갑자기 제자의 이혼한 누나로부터 -한 번의 만남으로부터 6 년이란 시간이 지나 -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그 남자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거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긴 전개가 될런지 전혀 짐작도 못하겠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되는거다. ㅎㅎ

제가 처음 당신과 만난 것은 벌써 6년이나 지난 옛일입니다. 그때 전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동생의 스승, 그것도 어느 정도는 불량한 스승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죠. 그리고 함께 컵에다 술을 마신 뒤, 당신은 제게 가벼운 장난을하셨죠. 전 아무렇지 않았답니다. 단지 이상스레 몸이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어떤 감정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생의 기분을 좀 맞춰주려고 당신이 쓴 책들을 빌려 어떤 건 재밌어하며 또 어떤 건 지루해하면서 읽었지요. 그다지 열심히 읽진 않았는데, 6년의 나날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어느 새 당신이란 존재가 물안개처럼 내 가슴속으로 스며든 겁니다. 그날 밤, 지하실 계단에서 우리가 한 일도, 불현듯 그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라, 뭔가 그건 내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중대한 순간이었다는 기분이 들고, 당신이 너무나 그리워서, 이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옥죄어와 흐느껴 울었습니다. - P96
훨씬 전에, 당신이 아직 홀몸이실 때, 그리고 저도 아직 야마키씨와 결혼하지 않았을 그때, 우리가 만나 결혼했더라면 저도 지금처럼 괴로워하지 않고 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과결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념하고 있습니다. 당신 부인을 밀어내는 일 같은 그런 교활한 폭력은, 전 싫습니다. 저는 애첩(이런 단어는 죽어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지만, 애인이란 말로 바꿔봤자 의미는 마찬가지니 확실히 말하죠)이라는 신분도 참을 수 없어요.
하지만 보통 첩의 생활이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 같아요. 사람들 말로는 첩은 보통 볼일이 끝나면 버려진대요. 나이가 육십가까이 되면 어떤 남자라도다 본처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 첩 따윈 영 할 짓이 못된다고, 니시카타초의 하인과 유모가 하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 P97
하지만 그건 보통의 첩들 이야기고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이 절 좋아하신다면 우리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는게 당신이 일을 하시기에도 좋을 거고요. 그러면 당신 부인도 우리 두 사람의 일을 납득해줄 것 아니겠어요? 참으로 교묘하게 잘도 짜 맞춘 변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전 제 생각이 어디 한군데 틀린 점은 없다고 생각해요. - P97
문제는 당신 답변에 달렸어요. 저를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아니면 저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으신지 당신의 답변이 무척이나 두렵지만, 꼭 들어야겠습니다. 얼마 전 보낸 편지에도 전 ‘매달리는 애인‘이라고 쓰고, 또 이 편지에도 ‘매달리는 중년 여자‘라고썼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이 답장을 보내주지 않으면, 전 매달리려 해도 실오라기 하나 붙잡을 곳 없이 그저 혼자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 말라갈 겁니다. 당신의 한마디가 없으면 전 이대로 끝입니다. - P98
꼭 한번 이쪽에 놀러 오시지 않겠어요? 제가 먼저 나오지에게 당신을 모셔 오라고 말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당신이 그저 술김에 불쑥 들른 것처럼 해서 오시라고요. 나오지가 모시고 와도 되지만, 될수 있으면 혼자서 그리고 나오지가 도쿄에 가고 없을 때 오세요. 나오지가 있으면 당신을 나오지가 독차지하고는, 분명히 둘이서 오 - P102
사키 씨네로 소주 같은 거나 마시러 나가버려, 거기서 끝날 게 뻔할 테니까 말이에요. - P102
전 말이죠, 불량한 게 좋아요. 그것도 꼬리표가 붙은 불량을 좋아해요. 저도 그렇게 꼬리표가 붙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는 게 제가 유일하게 살길 같아요. 당신은 일본 제일의 꼬리표 붙은 불량자죠? 그리고 요즘은 또 많은 사람이 당신을 지저분하다, 천박하다, 하면서 심한 말로 공격한다고 동생한테 들었어요. 전 점점 더 당신이 좋아지는 거 있죠? 당신은 분명히 이런저런 여러 부류의 친구들이 있으시겠지만, 이제부턴 저 한 사람만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왠지 모르게, 전 그게 정답 같아요. 그리고 당신은 저와 함께 살며 매일매일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겠죠. 어릴 때부터 전 사람들에게 자주, ‘너랑 같이 있으면 피곤이 다 풀린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 P102
만나기만 하면 돼요. 이젠 편지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그저 한번만 만나주세요. 제 쪽에서 도쿄에 있는 당신 댁으로 찾아가면 가장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어머니가 늘 와병 중이나 다름없어 저는 붙박이 간호사 겸 하녀 노릇을 해야 해서 도저히 무작정 올라갈순 없답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아무쪼록 절 찾아 이쪽으로 한번 와주세요. 딱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나면 알게 될 일. 제 입가에 생긴 희미한 주름을 봐주세요. 슬픈 나날이 만든 주름을 봐주세요. 제가 하는 어떤 말보다 제 얼굴이 제 심정을 또렷이 당신께 알려드릴 겁니다. - P103
이런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자가 살아가려는 노력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생명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항구에 꼼짝 않고 고여 있는 숨 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어,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닻을 올려 항구 밖으로나가고 싶습니다. 머물러 있는 배는 예외 없이 더럽습니다. 저를 비웃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정박해 있는 배입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저 떠 있는 배 말입니다. - P104
제 말뜻 아시겠어요? 사랑하는 데 이유는 없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을 너무 늘어놨습니다. 제 동생의 말투를 흉내 낸 것 같기도 합니다. 그저, 오시길 기다릴 뿐입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뿐입니다. 기다림. 아아, 인간의 삶에는 기뻐하고 화내다가 슬퍼하고 증오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지만, 그래도 인생의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감정들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사는 것 아닐까요. - P106
-5 나는 올여름 한 남자에게 세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한 장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그 외에 다른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 통의 편지에 내 가슴속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던터라, 절벽 끝에 서서 성난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우체통에 넣었건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오지에게 그 얘기는 함구하고 그 사람에 관한 얘길 들어보니, 그는 이전과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이 매일 밤 술이나 마시며 돌아다니고 점점 더 부도덕한 이야기를 써서 세상의 빈축을 사고 지탄받고 있는모양이다. - P107
그저 나 혼자 멀찍이 동떨어져 불러봐도, 소리쳐봐도 아무 메아리도 없는, 황혼의 가을 들녘에 초라하게 서 있는 듯한,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처절한 고독에 휩싸인다. 이게 그 실연이란 것일까. 들녘에 이렇게 홀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사이, 해도 지고 마침내 밤이슬에 얼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걸까 생각하면 메마른 통곡으로 어깨와 가슴이 부서질 듯 요동치고 숨조차 쉴 수 없다. - P108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어떻게든 상경해서 우에하라 씨를 만나야지, 나의 돛은 이미 하늘 위로 솟고 항구 밖으로 나왔으니 이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 가야 할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 이렇게 소리없이 도쿄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던 차에 어머니의 상태가 심상치않았다.
어느 날 밤 기침이 심하게 나서 열을 재보았더니, 39도였다. "오늘 날이 추워서 그렇지. 내일이면 괜찮을거야." 어머니는 여전히 콜록대면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씀하셨지만, 내 눈에는 왠지 보통 기침 같지는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아랫마을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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