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묘하게 감동이 있다!


"인간이 왜 사막을 무서워하는 줄 아나?"
버진이 내 말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꺼낸다. 하지만 회피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적당한 지식을 이야기한다.
"생명유지에 사막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때문이지. 물도, 먹이도 없으니까."
"조용해서야." - P59

말을 마친 버진이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다문다. 주변이 한순간에 적막해진다. 하지만 이곳이 조용하다고 느끼는 건 인간 감각의 한계일뿐, 실제로는 아닐 터였다. 인간의 청각기관이 감지할 수 없는 소리가 사방에서 쉬지 않고 불어닥치고 있으리라. 모래를 걷는 전갈의 걸음과 새의날갯짓, 대기권에서 타들어가는 유성과 지금도 우리를 스치고 있을 우주의 전파까지. 사막은 시끄럽다. - P59

소란스럽고 가득하지만 인간에게 허용되지않는다. 그건 꼭 토라질 때마다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하는 랑의 고집과 닮았다. 나에게 화가 났음을 몸으로 말하던 행위. 내가 알아차릴 때까지.
그렇다면 이 사막도, 사막인 적 없던 이 땅도 인간에게 화가 났음을 침묵으로써 표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비유를 해본다. - P60

"사막이 조용하다고 느끼는 건 인간의 청각 기능의 한계일 뿐이다."
"그럼 더 무섭지 않겠나?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공간이라니."
"그렇다면 소리가 있다면 무섭지 않나?"
"외롭지 않을 테니."
물도, 식량도 아니라 침묵이 인간을 두렵게 하는 거라면 이 사막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소리가무엇인지 추측한다.
가령 랑의 목소리 같은 것.
고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 같은 것. - P60

"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알고 싶어 한다는 것과 설명하고 싶다는 것은같은 의미일까. 그렇다면 나는 알고 싶은 게 맞다.
나는 지카에게, 그리고 랑에게 내가 언제, 어떻게.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고 왜 나 홀로 파괴되지 않고 땅에 묻혀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싶다.
"안다는 게 대체 뭔지, 알고 싶다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자네도 알아야만 하는 저주에 걸린거야. 인간을 본떴으니까." - P68

"한때 사람들은 나에게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 칭했지."
미약한 바람이 불어온다. 모래 폭풍일까. 주위를 살핀다. 다행히 폭풍의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신성한 존재였고,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의 등에 몸에 깃든 불씨를 제거하는 그림을 그리며 자랐어. 뭣도 모르는 어린애 한마디로 다음 목적지를 정했고, 내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사후세계에 안전히 안내할 거라고 믿었지.
희망을 얻기 위해서. 나는 그 역할만 하면 됐어. 그래서 아무 말이나 자신 있게 던졌지. 힘이 된다면,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면 진실따위 다 무슨 소용이겠어? 배도 부르지 않고 목도 축일 수 없는 그까짓 거. 여러 의미로 대단하지 않나? 인간이 망친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
- P70

버진의 시선이 지평선 어딘가에 닿는다. 얼굴에주름이 깊어졌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나는 그래서말을 하려다 입을 다문다. 버진은 내가 보지 못하는 자신의 삶 한편을 들추고 있다. 마모되지 않은기억의 모서리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다. 내가 할수 있는 건 그 날카로움에 손끝이 베이지 않길 기도하는 것뿐이다. - P70

시간을 달라 부탁하고 나는 차분하게 살리의 말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내게 감정을 판단하고 느낄 교감신경과 뇌가 없더라도 중요한 건 내가 그감정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는 것이다. 완벽하지않더라도, 그건 감정이다. 결과보다 행위가 중요하듯이, 감정을 느끼는 정확한 지점보다, 감정을따라 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어쩐지 ‘흥분‘되는 것 같다. 그건 나는 할 수 없는 신경계의 변화이지만 흥분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살리를 마주 보며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내가 느끼는 흥분의 감정일까. 나는 빠짐없이랑의 감정을 느꼈던 걸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믿고 싶다는 걸 믿고 싶다. - P135

"고고, 너는 랑을 만나고 싶은 거지? 간절하게."
나는 망설이다가, 그 단어와 내가 맞는지를 다시 의심하다가, 또 다시 멋대로 재생되는 랑의 영상을 목격한다. 죽은 랑의 얼굴이 떠오른다. 심장이 멈춘 랑의 차가운 몸이 불러도 대답 없던 랑의 평온함이, 그 옆에 서서 한참 동안 랑을 내려다보던 내가 떠오른다. - P140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하지만 완벽한 방법은 아니야."
나는 무엇이든 좋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말의 첫머리부터 음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포기한다.
"내 힘으로 네 몸의 시간을 느리게 하는 거야.
그럼 망가져도 그 속도가 느릴 거야, 인간이 느끼기에는 무한으로 느낄 만큼. 하지만 분명한 건 멈췄다거나 나은 게 아니야. 너는 계속 계속 망가지다가 어느 순간 시간이 붙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갈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여러 번.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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