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에서 빌런을 만났습니다.
식물도감이 배달되어온 날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고, 식탁에 앉아 완두콩을 까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깐 완두콩 한 알을 집어 살피더니휙 집어 던졌다. "사람들이 참 양심이 없어. 겉만 그럴싸하지 안은 다 썩었네." 엄마는 신경질을 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눈치를 보다가 거실로 갔다. 식물도감이 택배 박스안에 든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1년을 졸라도 사주지 않던 것을, 동생이 가지고 싶다고 하자마자 집에 들였다. 나는 도감 중 한 권을 집어 들어 펼쳤다.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이파리를 쫙벌리고 있는 작은 식물, 파리지옥이었다. - P7
-아주 작은 날갯짓을 너에게 줄게
날개를 묶는다. 매일 아침 나와 동생은 서로의 날개를 묶어 준다. 깃털 끝에 강력 테이프를 붙여 등에 접착하고 그 위에 보호대를 차면 준비 완료다.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이지만 보호대 안에 날개를 밀어 넣을 때의 답답함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보호대 때문에 등에 살찐 것처럼 보여."
이지는 몸에 딱 붙은 교복 상의를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 이지의 날개는 내 것보다 약간 더 크다. 깃털도 더 풍성해서, 보호대를 차면 거의 티가 나지않는 나와는 달리 동생의 등은 약간 불룩해진다. 날개를 묶을 때마다 나와 동생 중 누구 한 명이 힘을이어받게 된다면 이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힘을 담기에 내 날개는 너무 작다.
힘. 날개를 가진 두 사람 중 한 명만이 힘을 이어받는다. - P39
-아홉수 가위
아홉수다. 아홉수인 해에는 재수가 없다는 말을한 번도 믿은 적 없지만, 그런 셈 치고 싶다. 그렇지않으면 스물아홉 살 생일에, 술도 마시지 않은 맨정신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앉아 있을 리가 없다. 뭐가 문제일까. 나는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벽에 설치된 행거를 바라봤다. 빨래건조대 겸 옷걸이로 쓰는 흰색의 길쭉한 봉에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 P67
-어둑시니 이끄는 밤
지금보다는 조금 옛날에 말이야. 한 소년이 있었어. 소년은 세상이 온통 새까맣던 날 태어났어. 그렇게까지 예쁘고 완벽한 깜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같은 밤이었지. 그 밤에 잠들어 있던 어둠은 소년의울음소리에 깨어났어. 소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어둠은 소년이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해 주겠노라 마음먹었어. 그래서 소년의 밤을 어둠으로 감쌌지. 예쁘고도 완벽한 깜장을 선물해 주려고 그러니깐 어둠을 무서워하지 마. 소년이 어둠을 무서워하면, 그 마음이 어둠 안의 귀신을 불러낼지도 몰라. 힘내. 한 발자국만 더 걷자. - P103
그런데 네가 어둠 안에서 처음 길을 잃었던 날 말이야. 밤 10시가 되도록 집을 못 찾아왔던 그날, 처음으로 어둠이 무섭더라. 어둠이 내 동생을 삼켜 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희재야. 너도 알게 될 거야. 너를 해치는 어둠도있지만 보호해 주는 어둠도 있다는 걸. 그걸 구분할수 있어야 해. 무서워서 도망만 치면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려. 어둠과 마주 볼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해. - P131
••• 어둑시니는 그때부터 말이야. 소년의 친구가 되었어. 소년이 밤에 길을 헤매기라도 하면 제대로된 길을 알려주었어. 내가 너에게 해 주듯이 소년은 어둠을 마주 보며 어른이 되어 갔지. 희재야. 형이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
그래, 어둠은 소년을 사랑해.
형은 너를 사랑해.
잊어버리면 안 돼. 절대로.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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