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장 사라진 여인 예전에 사귀던 (아니, 사실은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같이 들판을 걷다가 이별한 남자가 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순간 그는 말했다. 우리 사이가 서로 평행선으로만 뻗은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고. 그에게는 그것이 우리 관계의 본질인 것 같았지만 그 평행한 길이 우리의 애매했던 운명을 분명히 한 것인지 괜히 둘러대는 얘기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 P263
그의 이름은 마틴이었다. 그나저나 주책스럽게 마틴은 또 왜 떠올랐을까. 나는 빗속의 고양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억의 습지대에 거북하게 묻어둔 이야기였는데 실연당하며 비운의 여인이 되었던 그 일을 내가 뭐하러 끄집어냈을까. - P263
그러고 보니 그 일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그 순간 내가 들어서던 들판이었다. 개간이 되어 하수구가 십자로 깔리고 수문들이 설치된 그 들판은 겨울이면 도랑에 수은 같은 물이 흐르지만 그 한여름 무렵에 찾은 도랑은 불쾌하고 칙칙한 녹색을 띠면서 습지대 특유의 안개를 피워 올렸고 낮은 깍깍 소리가 아니라 꽥꽥 소리를내며 우는 낯선 침입자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 P264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투신한 곳이 바로 이곳, 다운스 중간의 저지대였다. 느닷없이 참담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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