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걷다 보면 어느새 빠지게 되는 비몽사몽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다리와 머리가 따로 놀아 서로 보조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케네스 그레이엄과 버지니아 울프 역시 이런 희한한 현상을 칭송하는 글을 썼고 이 상태가 글쓰기에 필요한 영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 P136
케네스 그레이엄은 말년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걷는 사람들에게 자연이 선사해주는 특별한 선물이 있다. 반기계적으로 걷다 그 선물을 얻게되면 다른 식의 활동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수준까지 정신이 깨어난다. 그러면 정신은 말이 많아진다. 상상력이 피어나 살짝 미친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창의성이 빛을 발하고 고도로 예민해지면서 급기야 유체에서 이탈해 자기자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한 경지에 다다른다." - P136
버지니아 울프의 경우엔 다운스의 산마루에서 몽환적인 상태로 자신이 쓰게 될 글을 지껄인 적이 있다고 썼다.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반쯤 정신착란의 상태로 성큼성큼 걷다 보니 입 밖으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버지니아는 그런 상태를 수영에 비교하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감정과 착상의 흐름, 언덕과 도로와 색채의 느리지만 신선한 변화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이 모든 것이 한데 휘저어지다가 더없이 평온한 행복의 층이 생겨난다. 그럴 때면 나는 사실 이 층에 가장 밝은 그림을 그리면서 크게 소리 내어 말할 때가 많다." - P136
나는 배를 깔고 누워 시야가 트인 도랑에서부터 초원을지나 그 뒤의 숲까지 쭉 한눈에 담았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제 들판 하나만 지나면 틀림없이 강이 나올 테고 그 뒤로 3.2킬로미터를 가면 이즈필드였다. 두더지 모울이 지리를 이렇게 저렇게 더듬어보다 정든 고향에 거의 다 왔음을 직감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지리를 가늠하던 중에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 P138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저 초원 꼭대기를 굽이돌아 흐르던 강이 있었다. 넘칠 듯 강둑으로 차오르고 수면에는 잡초가 물살에 따라 너울거렸던 강이. 그 강을 반갑게 떠올린 이유는 강폭이 3미터에 깊이도 거의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수영을 즐기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물푸레나무 그늘 아래로 흐르는 강물이 흡사 석탄 물 같아 보여서 선뜻 뛰어들지 못하고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물속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간절했고 강물 색도 전에 봤을 때보단 훨씬 깨끗하긴 했지만, 발가락을 담가보니 덩어리진 침전물이 묻어 올라왔고 황갈색의 작은 물고기 떼가 수면을 스치며 빠르게 헤엄쳐 다녔다. - P138
나는 이즈필드 다리 근처에서 산사나무 아래에 앉아 진녹색 야생 자두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우는 푸른머리되새를 구경했다. 쨍쨍한 햇빛에 늘어져 있는데 낚시꾼 두 명이 지나갔다. 두 사람 모두 머리를 빡빡 밀었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한 사람은 휴대전화로 통화 중이었다. "그래, 이 친구야, 표지판도 있으니까 잘 봐봐. 필트다운의 그 주유소까지 쭉 내려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돼. 그래, 이 친구야. 그렇지! 알았어, 조금 이따 보자고." - P139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하루 종일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날 종일토록 사람 구경을 못했던 것은 아니다. 플레칭에서 옥수수밭 사이로 걸어가는 사람도 보고, 샤프스브리지 인근의 농장을 지날 때도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모자도 쓰지 않고담벼락 쪽의 쐐기풀을 제초기로 베어내던 남자를 봤다. 인기척은 드물었지만 새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강둑의 산사나무에서 새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넘쳤다. 굴뚝새의 날카로운울음소리는 병 안에 동전이 떨어지며 부딪치는 소리 같았고, 박새들이 일제히 울어대는 소리는 그리스어로 의견과 훈계를 주고 받는 소리처럼 들렸다. - P139
그만 가서 자려고 발길을 돌렸을 때 하늘에 불이 붙은 듯했다. 순간순간 변하는 저녁노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불가능했다. 앵커 Anchor 부근의 들판에서 댕기물떼새 한 마리가 날개를 노처럼 퍼덕거리며 하늘을 날았다. 동쪽의 물푸레나무 군락지 쪽으로 갸름한 달이 나타났다. 좀 전에 흘끗 봤던 물고기와 똑같은 흐릿한 은빛이었다. 저녁노을은 꽃가루나 먼지나 검댕 입자들이 대기 중에서 빛을 분산시키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 P143
그날도 푹푹 쪘다. 나는 크리켓 구장을 가로지른 후 길게 뻗은 돌투성이의 길을 걸어 강가로 내려갔다. 그날 아침만큼 행복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걷다보면 거품이 솟듯 들판이 지평선 위로 솟아올랐다. 바컴 밀스로 향하며 보트하우스 농장의 방목지를 지나갈 때는 노래도 흥얼거렸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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