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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오연홍 엮음, 김요한 외 옮김 / 숨쉬는책공장 / 2023년 2월
평점 :
'빵과 장미'는 새로운 여성주의 페미니즘을 선언하며 탄생한 사회주의 여성 단체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시작(2003년)되었고, 현재는 아르헨티나를 넘어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볼리비아, 미국, 페루, 독일, 이탈리아,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 등 14개 나라에서 활동하는 국제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빵과 장미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페미니즘 운동을 노동자 계급과 연결하고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채택하도록 밀고 있다. 빵과 장미의 활동은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한다. 임신중지권(아르헨티나, 칠레, 미국 등) 운동, 여성 살해 반대 운동, 99%를 위한 페미니즘 운동, 성 소수자를 위한 법안 상정, 더 나아가 젠더 폭력이나 성별 격차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려 노력한다.
이 책의 소제목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이다. 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빵과 장미'는 생존권(빵)과 참정권(장미)으로 대표되는 이념들을 위하여 투쟁한 경험과 주장을 묶어 엮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마지막 4장에서 빵과 장미 국제 선언문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들어와 있지 않은 단체이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활동이 쉽지 않을거 같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에서 살펴본 임신 중지권 활동이나 니우나메노스(Ni Una Menos : '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서 아르헨티나에서 전개된 여성 살해를 규탄하는 전국적인 대중운동의 구호이다.) 등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특히 나와 같은 페미니즘 비기너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하는 가사 노동의 가치를 사회적 재생산으로 개념화하여 설명한 부분들 - 페미니즘 이론가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들까지... 사회주의니까 사실 빼놓고 설명하기가 더 어렵긴 하다. - 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끝까지 참고 읽어낸 나에게 그나마 작은 수확이 되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결국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도 들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ㅠ.ㅠ 읽을 수 있을지는 알수 없다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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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이라고 단순히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실 전혀 와닿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나에겐 장미에 대하여 이미 각인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빵과 장미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을 해보게 된 계기는 얼마 전 읽었던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를 읽으면서부터이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오웰은 사회주의자로서 여러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고,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그의 노선을 알고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영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오웰이 활동하던 당시로 돌아가보자. 사회주의 잡지인 <트리뷴>지에 발표한 그의 글들을 보고 한 독자가, 그의 글들이 '부정적'이고 '항상 뭔가를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비단 한 사람의 독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 중인 영국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었으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도 작가도 부정적일 수밖에. 그래서 오웰의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글들은 독자로부터 더 비난받기 쉬웠다. 그러나 오웰은 "나는 칭찬할 거리가 있기만 하다면 칭찬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영국 울워스에 자신이 심었던 장미 나무에 대하여 글로 자기 자신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위트있는 행동이냔 말이다.
오웰은 이렇게 제안한다.
"나무를 심는 것, 특히 오래가는 단단한 나무를 심는 것은 돈도 수고도 별로 들이지 않고 후세에 해줄 수 있는 선물이다. 만일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당신이 선악 간에 행한 다른 어떤 일이 갖는 가시적 효과보다도 훨씬 오래갈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글인가! '빵과 장미'에서 장미가 의미하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일상적인 즐거움과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인간이 누리고 싶은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며, 그래서 장미가 단순히 참정권으로만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오웰의 글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여성의 참정권을 위하여 투쟁하던 시절, 여성이 투표를 해서 모든 사람이 빵을, 그리고 꽃도 갖게 된다는 사실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눌린 여성들일지라도 식탁에는 한 송이 꽃을 꽂고 싶어하고, 작은 화분 하나일지라도 그저 비워두지 않고 꽃씨를 뿌리는 마음이 왜 소중하지 않겠는가! 참정권 운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했던 억눌린 여성들은 투표로써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딸은 나와 같은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혁명적 페미니즘 운동이 "빵과 장미"라는 것이 너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1910년대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헬렌 토드의 문구를 인용해본다.
투표는 "집과 안식처와 안전이라는 인생의 빵과, 음악과 교육과 자연과 책이라는 인생의 장미를 이 나라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누리게 될 때가 오도록 도울 것이다. 여성이 발언권을 갖는 정부에서는 그러할 것이다. '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가 있게 되는 날에는 감옥도, 교수대도,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빵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내몰리는 소녀들도 없을 것이다."(오웰의 장미, 리베카 솔닛, 120)
빵과 장미를 위한 여성의 투쟁이 마냥 아름다울 수는 없다. 죽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위하여, 또는 성폭행 당하지 않을 권리, 나의 임신의 모든 과정을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한,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노동 현장에 서지 않을 권리라는 것이 왜 힘없는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권리들은 쟁취될 수 없는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 권리들을 쟁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빵과 장미'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지역에서 단결하여 수 천을 조직해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싸울 것이며, 국가와 자본가 정당에 의존하지 않는 여성 운동을 펼침으로써 여성들의 성차별적 폭력에 멈추지 않고 맞설 것이라고 한다. '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가 있게 되는 날'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남성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찬성한다. 빵과 장미의 도전이 구호만으로 끝나지 않기를, 그리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