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끝을 봐야겠다. 반납일도 연장하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그런데...
가사노동은 꼭 공적노동으로만 편입되어야 하는가?
가사노동이 사적노동이란 것은 맞지만, 그것도 여성들에게 선택이 되어야하는거 아닐까. 직업으로 인정되면 안되는 것인가? 공동식당, 빨래방, 청소, 바느질이 경제활동으로 재편되어야 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 기반한 이러한 투쟁방향은 나와 노선이 다른거 같다. 아무튼 나는 끝까지 내가 선택하고 싶다.

가사노동 임금지급 운동에 대하여
가사노동은 사용가치인가 교환가치인가? 현대에는 대체적으로 가치를 생산한다는 입장인가보다. 나도 가사노동해서 임금을 지급받고 싶은거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자본가들에게서? 국가에서? 남편한테서?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한걸수도 있는데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한 나의 노동은 누구에게서 혹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나 알 수 없지만, 이 노동에서 살아있는 한, 내가 원하는 한 해고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엥겔스는 생산수단이 사회화되면 개별 가족은 사회의 경제적 단위이기를 멈춘다. 사적인 가사업무는 사회적 산업으로 전환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아동 돌봄과 교육은 공적 업무가 된다."
 비록 이 지점을 이론적으로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엥겔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사노동이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묶여 있는 사회적 노동 중 일부라는 점을 인식했다. 더욱이 그는 공산주의 사회의 목표 중 하나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꼽는다.
그리고 이런 전망을 물질적인 힘으로 만들어낸 러시아 혁명만큼 이 이론을 실천적으로 잘 검증한 사례가 있는가?  - P174

1919년 8월, 볼셰비키당의 여성 투사들이 제노텔[여성부]을 설립했다. 제노텔은 여성 노동자·농민 · 주부로 구성됐고, 내전의 고난을 겪는 동안 여성들 사이에서 특별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다.
1920년 11월 임신중지가 합법화됐고 동성애가 비범죄화됐으며, 혼외 자녀의 평등한 권리도 인정됐다.

 이 기간은 치열한 논쟁과 실험으로 가득 찼고, 여성해방 · 성해방 · 개인적인 관계의 변화 등이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투쟁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 시절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급 재생산 노동과 총체적인 생산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탈바꿈시켜야했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국립 어린이집·유치원 · 공동 식당 ·빨래방 등 가사노동을 사회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제안됐다. 그 목표는 각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런 업무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부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3.1 만세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1919년은 투쟁의 시기였어.
- P175

미국 역사학자 골드먼이 설명하듯이, "가사노동은 공적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수히 많은 개별 여성이 각자의 가정에서 무급으로 수행한 업무를 공동 식당, 빨래방,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유급 노동자들이넘겨받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콜론타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모든 집안일이 제거될 것이고, 소비는 가족 내 개인적인 활동이기를 멈출 것이다. 사적인 주방은 공적인 대형 식당으로 대체될 것이다. 광업, 금속 가공업,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바느질, 청소, 세탁이 경제활동으로 재편될 것이다." 이네사 아르망 역시 ‘가내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1918년 열린 여성노동자농민대회에서 그는 여성 노동자가 공장과 집에서 이중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현실을 규탄했다. 레닌 또한 "실질적인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법적 평등만이 아니라 가사노동을 사회화된 노동으로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여러 번 지작했다. - P176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목표가 삶을 지속시키는 것인 한, 동시에 그것은 자본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확실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질문이 제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의미가 무급 가사노동으로 제한되는 걸 피하려고 하면서, 이제는 그 의미가 너무 확장되는 건 아닌가? 그 경계선이 다소 모호해진 게 아닌가?
예컨대 아루짜는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 매장 노동자의 일을사회적 재생산 노동에 포함시킨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가정으로 - P177

음식을 배달하는 플랫폼 노동자, 술집과 식당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도 여기에 포함해야 한다. 게다가 가족을 위해 식료품을 구매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슈퍼마켓 계산원을 포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면 그 식료품을 운송하는 노동자는?
 우리는 이렇게 생활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일련의 직무를 계속 포함해 나갈 수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확인했듯이 세상에 그런 직무는 아주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그 의미가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면, 도리어 설명력을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또한 이는 폭넓은 사회적 재생산 범주에 속한 다양한 유형의 노동에 내재한 질적 차이를 다소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 P178

이상의 논의에 따를 때,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하며, 자본의 통제에 종속돼 있지는 않다. 파울라 바렐라는 다음과 같이 옳게 설명한다.

"가정이 정말 말 그대로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면, 여기에서도 상품 생산의 논리가 똑같이 지배할 것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시장에서 쓸 만하게 팔릴 수 있도록, 즉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관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게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도 이 상품은 생산을 멈추지 않는다. 실업률이 높을 때도 아이들은 계속 먹이고, 씻기고, 가르치고, 옷을 입혀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노동은 더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조건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서는 과잉 공급 때문에 ‘해고‘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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